(2) 그 남자의 손 맛
지하철 1호선 부천 역 남쪽 출구로 나오면 가운데 광장을 두고 오른쪽에 아케이드로 연결된 오래된 시장이 나온다. 그야말로 온갖 것들을 다 팔고,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그래서 온갖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혁의 사무실은 바로 그 시장 골목 바깥 쪽, 8차선 대로에 위치한 3층 건물 꼭대기다. 1층에는 중년부인들을 상대로 하는 알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된 브랜드의 옷가게가 있고, 2층은 젊은 부부가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혁이 사무실을 계약하게 된 이유 중에 이 카페도 한 몫을 했다. 늘 신선한 원두 향을 맡을 수 있고 편하게 갓 내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3층까지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함을 감수하게 했다. 3층은 매장으로도, 사무실로도 애매한 넓이의 공간인데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 때문에 오래도록 세가 나가지 않았다. 그 덕에 혁이 시세보다 저렴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화장실도 사무실 안에 달려있어 따로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도 혁에게는 큰 장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면에 벽을 다 채운 커다란 통 창이 있다. 창문을 통해 오가는 버스와 길 건너 상가들 까지 훤히 다 보였다. 그 앞 작업대에는 간단한 먹거리와 온갖 책들이 너저분하게 놓여있다. 벽면에는 온갖 사건들에 대한 신문 기사나 철마다 유행한 영상작품들에 대한 잡지 기사 등을 스크랩해서 여기저기 붙여놓았는데, 모르는 사람 눈에는 나름 그럴듯한 인테리어처럼 보이는 효과를 자아냈다. 한 가운데 자리한 커다랗고 넓은 탁자 위에는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가 연결되어 있다. 그 흔한 커피머신 하나,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 없다. 오로지 소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 구비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혁의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법적으로나 명목상으로나 혁의 사무실이지만 주인은 무진이라고 봐야했다. 1층의 여성복 가게를 운영하며 이 건물을 소유하고 계시는 김선자 여사가 무진의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혁은 계약만 했을 뿐, 월세며 관리비 일체는 무진이 알아서 해결하고 있었다.
“작가님, 계세요?”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아래층 카페 남자 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번에 새로 블렌딩한 커피인데 맛 한 번 모시겠어요?”
노트북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던 혁이 고개를 들었다. 흡연자치곤 미각이 예민한 편인 혁을 신뢰해서인지, 아니면 유명하지 않아도 작가가 평해주는 커피라는 점이 매력인건지 사장은 새로 원두를 블렌딩할 때마다 커피를 내려서 혁에게 가지고 왔다.
“살짝 배 맛이 베이스에 깔려서 단맛도 나고 향기도 나네요. 거기에 산미가 깔끔하고요.”
“역시 예리하세요! 이번에 에콰도르 산 원두를 받아봤는데, 과일향이 은은해서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어때요, 이대로 드립백 만들면 괜찮을까요?”
“그럼요, 새벽에 작업할 때 마시면 글이 술술 써질 것 같은데요.”
“다행이네요, 작가님 덕분에 드립백 만드는 재미가 붙었어요. 심심찮게 팔리기도 하고요.”
혁이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더 마시는 동안 사장은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작가님은 요즘은 무슨 작품을 쓰세요? 소설인가요, 드라마나 영화? 와이프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하고 계실 거라고 말하는데, 저는 왠지 작가님이 소설을 준비 중이실 거 같은 느낌이 들어가지고요.”
커피의 향에 긴장이 풀어지려던 혁은 이어지는 사장의 수다에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남이 소설을 쓰건 시나리오를 쓰건 그걸 왜 카페 사장이 신경 쓴단 말인가? 퉁명스러운 말을 뱉을 뻔했지만 곧 안경을 고쳐 쓰고 평소보다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럴 땐 약간의 허세와 연기력이 필요하다.
“음, 지금 진행 중인 작업은 아이디어 도용 문제로 함부로 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아, 그렇죠, 당연히 그러시겠죠. 제가 실례한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래도 사장님께만 조금 말씀드리자면, 액자식 구성을 활용한 코지미스테리에 로맨스 스릴러를 가미해서 인간의 나약한 면모와 지식인이 지니는 허영을 통렬하게 꼬집는 휴머니즘색채가 강한 작품입니다. 아직 기획단계라서 섣불리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슈퍼IP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업이랍니다.”
“여...역시, 그러시군요! 뭔가 어렵고 막히시는 게 있다면 제가 도울 일은 없지만 커피가 드시고 싶으실 땐 언제든지 내려오세요. 제가 커피 한 잔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하면서 글 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거든요.”
젊은 사장의 말이 길어질 낌새가 느껴지자 혁이 바로 말을 끊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럼 미팅이 잡혀있어서, 준비를 좀......”
“이런, 제가 방해를 했군요. 네, 미팅, 그러셔야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살짝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혁은 속으로 열을 세고 나서 재빨리 문을 잠가버렸다. 오후에 반드시 길 건너 다이소에 가서 ‘외출중’ 푯말을 사다 걸어놓으리라 다짐하며 노트북 화면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메일함에서 진이 보내온 파일을 클릭하자 화면에 눈부시게 하얀 창이 펼쳐졌다.
3.
-이것도 아냐, 안 돼, 이렇게는 설득력이 없어, 그럼 이렇게? 이 방향으로? 아냐, 어색해. 억지 같잖아.
J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좁은 거실을 배회하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독일산 과도를 쥐고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섬뜩한 분위기를 풍길 지경이었다. 팔을 들어 올렸다 빠르게 내리 꽂는 동작을 반복하는 사이 이마와 목덜미에서는 땀이 흘렀다. 집 안에는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찼지만 J의 눈빛은 흥분이나 광기와 거리가 먼 차가운 빛이 가득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K가 소리 지르기 전까지 J는 멈추지 않고 계속 칼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야! 깜짝 놀랐잖아! 위험하게 뭐야 진짜!
갑작스런 타인이 목소리에 놀란 J가 멍한 얼굴로 K를 바라보았다.
-뭐하는 거냐? 안 그래도 더워주겠는데, 아 씨, 기운도 좋네. 일단 칼부터 이리 내, 사람 불안하게.
J는 순순히 칼을 내밀었다.
-언제 왔어?
-방금, 비번 누르는 소리도 못 들었어? 땀 흐르는 거 봐, 글이 안 써지면 나가서 운동을 해. 혼자 방구석에서 미친 짓 하지 말고.
K는 과도를 받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에어컨부터 켰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K를 눈으로 좇으며 작은 목소리로 J가 말했다.
-미안, 아직 칼로 찌르는 느낌을 잘 모르겠어서.........
-야 됐어, 작가가 모든 걸 다 알고 쓰는 건 아니라고 했지? 상상력이 왜 있겠어, 작가가 상상해서 쓰는 거잖아.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냐? 아니잖아? 안 그래? 헛짓거리 하지 말고 커피나 마셔.
K는 자신이 사온 저가커피매장의 커다란 플라스틱 컵을 J에게 건넸다. 얼음이 가득한 컵에 든 커피는 오래된 원두를 쓴 건지 탄 맛이 강했지만 J는 커피의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J가 멍하니 커피를 마시는 동안 K는 자신이 마실 돌체라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노트북을 열었다.
-오다가 생각났는데, 전에 보던 드라마에서 탄수화물 살인마 있었잖아. 오랫동안 참고 살면서 남편한테 탄수화물 식단으로만 밥을 차려줬고, 결국 남편이 건강 악화로 죽는 거. 그거를 참고해서 생각해봤는데, 설탕으로 죽이는 거야, 그럴듯하지? 네티즌들이 설탕 살인마라고 이름 붙일 거 같지 않아?
질문처럼 말했지만 사실 J의 의견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미 K는 ‘설탕과다복용’, ‘설탕의 부작용’, ‘당분과다섭취’같은 검색어를 넣고 자료를 찾고 있었다.
- 잊어버릴까봐 얼마나 서둘러 돌아왔는지 아냐. 설탕을 듬뿍 넣으면서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일단 간식에 탕후루는 꼭 들어가야 돼.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방안을 채우기 시작했을 때, 조용히 J가 방으로 들어왔다. K는 알 수 없는 멜로디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탕 많이 먹으면 죽나요?’ 같은 문장을 넣어 지식검색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 아, 콩국수랑 팥칼국수도 설탕을 듬뿍 넣어서 차리는 거야. 단호박죽도 괜찮지. 생각하니까 시원한 콩국수 땡기네, 저녁은 콩국수 먹으러 갈까? 난 사실 콩국수는 소금이랑 먹어야 맛있더라고. 인정?
K가 J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는 순간, 등 뒤에 서 있던 J가 왼손으로 잽싸게 K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거실에서 반복하던 동작을 그대로 반복했다.
쑤욱..그 순간 J와 K의 귀에 동시에 ‘쑤욱’이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부드럽고 수줍으면서 거리낌 없는 소리였다. K의 얇은 면 티셔츠를 가르고 설핏 자리한 복근을 지나서 저 안 쪽 어딘가 J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에 과도가 도착했다.
K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배에 꽂힌 칼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식탁위에 내려놓았던 독일제 과도였다.
- 이게 뭐하는....?
- 미안, 아무래도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진짜로 될지 안 될지 모르겠길래...…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들어가네……신기하다. 아, 근육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 이 미친 새끼가, 너 돌았어? 아니, 구급차, 구급차부터 불러!
- 안 돼, 좀 참아봐. 나만 좋자고 하는 거야? 우리 소설이잖아. 묘사가 생동감이 없고 현실감이 떨어진다며. 그러니까 직접 확인해야지. 어땠어, 타는 것 같이 아파? 아님 다른 느낌이야? 불러봐 내가 바로 적을게. 아니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J는 일어서려는 K의 어깨를 잡아 다시 소파에 주저앉혔다. 그 바람에 칼끝이 내장을 건드렸는지 통증이 몰아쳤다. 비명을 참으며 K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왼쪽 하복부 자상, 부엌칼, 다행히 출혈은 많지 않은 듯하다. 하필 핸드폰은 조금 전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같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제길. 거실까지 2m 남짓, J를 밀치고 달려가서 핸드폰을 집어 든다, 바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119에 신고한다. 할 수 있을까? 심장이 뛰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머릿속이 돌아갔다.
-그러지마, 알잖아, 지금 뽑으면 과다 출혈로 구급차가 오기 전에 죽을 거야. 괜히 움직이다 상처가 벌어지면 나중에 아물 때 고생할거야.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 과도라서 상처부위도 크지 않으니까 봉합도 쉬울 거야. 네가 직접 찌르는 건 어려울까봐 내가 대신 해준 거야. 고맙단 인사는 안 해도 돼. 우리 사이에 무슨. 찌를 때 느낌은 알겠어.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네 느낌이 어떤지만 알면 돼. 아파도 참고 얘기해보라니까.
- 씨발, 이게 무슨 짓, 흐윽...
K가 몸을 뒤틀며 신음을 뱉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J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가 구급차 사이렌인지, 창 밖에서 처량하게 오르가즘을 향해 내달리는 매미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음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