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Nov 23. 2022

아직 눈이 되지않아

기한만료를 앞둔 커피쿠폰을 핑계로 퇴근길 몸을 돌려 집앞 카페에 눌러앉았다. 전화기 너머로 아이들은 간만에 엄마가 짜장면 배달시켜준다고 좋아한다. 이 저녁, 티비와 짜장면으로 두 아들은 퐁실퐁실 살이 오를테고 엄마는 혼자 커피와 책을 먹으며 두둥실 여유로움을 만끽할거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고 음료를 주문한다. 핸드폰으로 배달음식을 결제하고, 책을 읽다 창밖을 바라보고, 떠다니는 노래중에서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골라 음미하기도 하고......좋아하는 작가님 책을 펼치고 있는데도 자꾸 딴짓을 하게 된다. 비가 살짝 내려서 그런거야, 처음 듣는 노래지만 정말 좋은걸, 떠다니는 단어들이 사라지기 전에 핸드폰 메모앱에 적어둬야지, 책 한 꼭지 읽고 딴 짓하고, 또 한꼭지 읽고 다른 일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다.


읽고 싶던 책을 들고 집중하는 평일 저녁이라니. 일, 이년 전만해도 생각할 수없던 호사다. 아이들이 이제 왠만큼 커서, 한 몸 같던 엄마로부터 떨어져나갈 만큼 자랐기에 가능해졌다. 아직 둥지를 떠날만큼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걱정할 만큼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이렇게 서서히 멀어지는거겠지.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by 한수희

득 쓸쓸해지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걸까, 흥겹고 설레는 롤이 가게안을 가득채운다. 통창밖으론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평온하게 줄을 늘어트리고 길을 걷는 모습이 보이고, 나는 또 한 모금 커피를 마신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내게서 멀어져가는 요즘, 글쓰기와 책읽기가 없다면 얼마나 무섭고 아득할까? 외로움과 공허감에 몸부림치다 넘어질지도 모르고 주변에 기대려다 관계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활자로 이뤄진 이 광대하고 아름다운 세계 덕분에 나는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인생 중반부를 넘기는 이 시간들이 그나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읽고 쓸 수 있다는 축복 덕분이다. 그러니 이렇게 홀로 책과 마주하며 나와 아이들 사이의 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가족 모두를 위한 배려이자 투자다.


예년답지 않게 따뜻한 11월이 계속되고 있다. 화단의 꽃나무는 지금이 봄인줄 알고 몇 송이 꽃도 틔웠다. 수능한파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11월 어느 화요일 저녁에 몇 방울 비가 내린다. 아마 올해 마지막 비겠지. 더 추워지면 첫 번째 눈으로 변할거다. 


아직 눈이 되기 까진 시간이 남았다. '아직 얼지 않았다'고 촉촉하게 젖어가는 땅을 보며 생각해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책갈피를 읽던 곳에 끼워넣고 가방을 챙긴다.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2022년 11월 22일 오후 8시.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 행복을 건져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