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Dec 11. 2022

생일과 선물, 그리고 크리스마스

  2주 뒤가 내 생일이다. 어릴 때부터 생일이라고 선물을 받아보거나 파티를 한다거나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도 딱히 생일을 챙겨주시지 않았다. 아마 미역국은 끓여주셨던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생일상을 받아 본 기억도 없고, 가족 외에 서로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던 친구도 없었다. 연애할 때도 생일이라고 챙김을 받아 보거나 함께 이벤트를 가져본 적이 없는 걸 보아 참 여러 모로 가난한 연애를 했던 듯 하다. 그래서일까, 살면서 생일을 챙겨야한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다. 


  이렇게 살아와서 생일을 축하한다거나 설렌다거나 들뜬다거나 받고싶은 선물을 고른다던가 하는 일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남편만이라도 내 생일을 챙길 것 같았지만, 머리카락 한 올까지 건조한 남편은 필요하지 않은 감정적인 일에 마음을 쓰는 법을 몰랐다. 나 역시 주머니돈이 쌈짓돈, 네 돈이 나의 돈인 경제생활에서 굳이 그 날이라고 선물을 사며 지출을 늘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남편 생일도 그냥 지나가고, 내 생일도 그냥 지나갔다. 그게 서로 편하기도 했다. 단지, 아이들 생일은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동네친구 하나 없는 직장맘이라는 핑계로 아이들 생일 잔치도 몇 번 해본 적 없고, 친구들 초대도 안 해봤다. 진수성찬으로 생일상을 차리는 것보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외식을 더 자주했다. 핑계같지만 솜씨없고 게으른 엄마라 아이들도 엄마가 만든 음식보다 나가서 먹는걸 더 좋아한다. 그래도 선물은 빼놓을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때쓰거나 타협하지 않고도 얻어낼 수 있는 합법적인 날이었으니 아이들도 이 기회를 날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이 넘어가면서는 선물을 살 일이 줄었다. 장난감 같은 물건을 받는 것 보다 게임할 때 현질할 수 있는 '기프트 카드'나 현금을 선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대형 마트 장난감 코너 앞에서 아이와 실랑이를 벌일 일도 없다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


  선물하니,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마음 한 곳에 자리잡아 잊혀지지 않는 선물에 관한 기억. 아주 오래 전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선물이다. 


  어릴 때 초등학교 다닐 무렵, 삼남매가 조로록 한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동네 자그마한 교회였지만 별다른 문화체험거리가 없던 시절, 교회에서 하는 행사들은 삼남매에겐 대단한 이벤트이고 즐길거리였다. 성탄절은 그 중에 최고로 반짝이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간식을 먹으면 산타분장을 한 누군가가 빨간 선물보따리에 가득 선물 상자를 들고와서 나눠주는데 눈이 빛나지 않을 어린아이가 있을까. 


  어느 해 24일 저녁, 나 역시 신이 나서 두 손을 꼭 쥐고 내게 올 선물을 기다렸다. 나보다 앞서 받은 아이들 중 성미가 급한 아이들은 서둘러 포장을 풀어버리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렸다. 커다란 인형, 로봇 같은 멋진 장난감들이 보였다. 어린 내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산타할아버지가 내 이름으리 불렀고, 나는 나가서 네모낳게 포장된 어른 손바닥 만한 선물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와 내 동생들이 받은 건 똑같은 수첩세트(아마도)였다.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이 아니었다.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선물이었다. 심지어 동생들도 똑같은 선물을 받았다. 저 선물은 진짜 산타가 나눠주는게 아니라, 미리 부모님들이 준비해서 제출하고 붙여진 이름표대로 불러서 나눠주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신자가 아닌 아이들, 미처 부모님이 선물을 준비 못한 아이들을 위해 교회에서 일괄적으로 구입해서 포장한 선물이었다. 내가 받은 선물의 실체를 알게 되고 얼마나 실망했던지. 그때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부끄러움보다는 수치심이 더 가까울 것 같다. 마냥 좋아할 어린 아이가 아니라 막 섬세한 자아의식과 자존심이 자라나기 시작한 감수성 폭발의 시기라 더 창피해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일 선물과 달리 크리스마스 선물에는 묘한 동경이 남아있다. 아이들에게도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택배로 받은 선물을 잘 숨겨두었다가 예쁘게 포장해서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머리 맡에 두는 정성을 기울이기도 했다. 잠에서 깬 아이들이 맨 처음 발견하고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몰래 숨겨놓은 선물을 들켜버린 적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피며 미리 준비하던 기억, 설레고 기뻐하며 기다리던 마음이 내게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올해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있어서 그런가 별다른 설렘이 없다. 혹시나 싶어 어젯밤 잠들기 전 아이와 이야기 나눠보니 역시나 기프트 카드와 현질 얘기를 한다. 낭만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렇다고 해도 가족 모두가 가지고 싶은 것, 혹은 주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보고 싶다. 꼭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꼭 생일이 아니어도 원하는 작은 것을 하나씩 가족들끼리 가져보고싶다. 더 욕심을 부리자면,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도 드려보고 싶고, 양가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하고도 싶고, 이왕이면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고도 싶다. 이런 대화를 나눠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작가의 이전글 용감한 기혼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