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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계절입니다.

by 피어라

다양한 과일이 넘쳐나는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면 먹을 수 있는 과일의 수가 줄어듭니다. 요즘에야 하우스 농법과 수입농산물 덕에 제철과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계절과 상관없이 과일을 즐기는 시대긴 합니다만, 제가 어릴 때는 겨울에 먹는 과일은 귤과 사과정도였습니다. 과일가게나 리어카에서 검정 비닐 봉다리에 담아 파는 귤이 그때는 그렇게 달고 시원했었지요. 엄마가 깎아주시던 사과는 또 얼마나 사각사각거렸게요. 껍질이 끊어지지 않게 한 번에 길게 깍는 엄마를 보면 무림의 고수를 보듯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3월이 지나고 달큰한 향기와 함께 과일가게에 딸기가 등장하면 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하지만 이제 딸기는 겨울과일이라고 합니다. 1월에 나오는 딸기가 가장 맛있다고 하더군요. 겨울 과일의 대명사 귤은 그냥 '귤'이라는 이름으로는 명함도 못내밉니다. 레드향, 천혜향, 황금향 등 달고 풍부한 과즙의 신품종들이 속속 시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과일들이 맹활약하고 있는 겨울이지만, 그래도 추석 즈음부터 이듬해 설날이 까지 자꾸 생각나고 자주 사먹는 과일은 사과입니다. 가을에 수확해 오래도록 보관하여 겨우내내 먹고 봄까지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니 참 고맙기도하지요.


초가을이 되면 초록색이 아직 여름의 더위를 떠올리게 해주는 아오리 사과가 먼저 나를 반깁니다. 마트에서 초록색 사과를 만나면 이제 여름이 지나갔다는 실감이 납니다. 깨끗하게 씻어 껍질째 먹으면 얇은 껍질의 맛과 약간 푸석거리는 듯한 과육이 적당한 신맛을 입안 가득 전해줍니다. 8월 말에서 9월 초에 나오기에 이 시기를 놓치면 싱그러운 초록사과의 맛을 못보니 한 번씩은 장바구니에 담게 되지요.


9월이 넘어가면 홍로가 나옵니다. 과일가게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보는 품종이라고 하지요. 빨갛고 예쁜 모양까지 수채화로 제일 먼저 그렸던 사과가 홍로가 아닐까 싶어요. 새콤한 맛이 일품인 홍옥에 비해 신맛보다 단맛이 더 강합니다. 과일가게 주인에 따라 이 홍로가 백설공주가 먹었던 독사과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답니다. 저도 예전에는 홍옥의 신맛이 떨릴 정도로 싫어서 달달한 맛의 사과만 찾았어요. 저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홍옥 재배량이 확 줄어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사과가 되어버렸다는군요. 그런데 요즘에는 단맛만 있는 사과는 또 맛이 심심해서 신맛이 강한 사과를 찾게 되더라고요. 사실은 더 늙으면 못 먹을 것 같아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많이 먹으려는 욕심 때문이랍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시나노 스위트를 박스채 사서 먹곤 했습니다. 껍질도 얇고 과육도 부드러운 편이라 소과로 주문해서 아이들하고 같이 하나씩 쥐고 와작와작 깨물어 먹었지요. 깨끗하게 씻어서 주면 껍질채 잘 먹었어요. 신맛은 거의 없고 단맛이 풍부해서 아이들이 좋아했거든요. 이름은 비슷하지만 색은 노란색이라 서양배처럼 보이는 시나노 골드도 맛있습니다. 신맛을 꺼려하는 어르신들은 시나노 스위트나 시사노 골드를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가을이 깊어지고 명절도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부사가 나옵니다. 보통 꿀 박힌 사과라고 과일가게에서 영업하시는 사과들이 부사가 많답니다. 일반적인 사과기도 하고 저장기간이 길어 오래 먹는 사과지요. 옛날분들은 후지사과라고도 부르십니다. 부사보다 풍부한 맛을 원할 때면 크고 빛깔도 좋은 감홍을 사먹습니다. 한 알을 깎아 풍성하게 나눠먹을 수 있는 푸짐한 사과지요.


알이 작으면 작은대로 혼자 쥐고 먹고, 크면 큰 대로 예쁘게 잘라 접시에 담아 온가족이 함께 먹고. 오목한 그릇에 담아 식탁위에 올려두면 그 자체로 장식효과도 좋지요. 사과를 활용한 레시피도 무궁무진합니다만, 사과는 단맛이 강하고 과즙이 풍부해서 굳이 파이나 잼을 만들지 않고 과일 그대로 먹는게 제일 좋지 않나 싶어요. 흔한 과일이지만 요즘엔 가격이 많이 올라 네 다섯 알이 담겨있는데 만원 돈이더라고요. 맘 편히 사다먹기도 쉽지 않습니다.


처음 과도를 들고 사과를 깎은 때는 언제일까요? 아마도 고등학생 무렵, 어른들 상차리고 치우실 때 과일 준비를 도왔던 때가 처음이지 싶습니다. 이후로 결혼하며 새댁이 되어 서툴게 사과나 배를 깎으며 긴장했던 날도 있었습니다. 엄마가 되고 아이가 이유식 먹을 때 간식으로 사과의 가장 좋은 부분을 긁어서 먹이곤했지요. 이제는 중간에 껍질이 끊기지 않게 잘 껍질을 깎아내고 먹기 편하면서 예쁜 모양새로 다듬어 플레이팅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사과를 좋아하는 건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슬며시 드네요. 먹거리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에도 깊이 자리해 문화 전반에 스며든 과일이잖아요.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따먹었다는 선악과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유혹적인 색감과 모양 때문일까요? 위대한 발견의 우연한 단초가 된 뉴튼의 일화 때문일까요? 저는 가지지 못한 매력적인 핸드폰 때문일까요? 사과 한 알을 먹으며 깊은 인문학적 사유를 끌어내기엔 제가 가진 것이 너무 일천합니다. 그저 이 사과 한 알을 먹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이 맛나고 탐스런 과일을 만든 손길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럴때는 함민복 시인의 시 한 편을 대신 놓아봅니다. 사과에 관해, 자연과 우주에 관해 이처럼 아름다운 시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사과를 먹으며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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