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얼마 전 브런치에 동갑내기 사촌에 관한 글을 두 편 올렸다. 어릴 때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동갑내기 사촌에 대한 글과, 동갑사촌과 잘 노는 내 아이에 관한 글이었다.
처음에는 아이들끼리 잘 어울려 노는 것을 보면서 사촌지간에 동갑인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동갑 사촌 아이들 글을 쓰려다보니 왜 꺼려했는지를 먼저 풀어야 했고 자연스레 내 어린 시절 이야기 부터 나왔다. 그러니까 동갑내기 사촌 2가 실은 먼저 쓰려고 했던, 원래 쓰고자 했던 이야기라는 거다.
아이 얘기를 쓰려고 했는데 내 얘기를 먼저 쓰게 되다니. 쓰면서도 약간 의아한 느낌이었는데, 쓸수록 이상한 느낌이 더 강해졌다. 글을 써가는데, 내가 글을 쓰고 있지만 글이 나를 풀어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옛날부터 자기 연민이 강해서 어린 날의 상처를 떠올리면 스스로 상처에 함몰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굳이 지난 기억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는데, 쓰다보니 저절로 어린 날의 내면이 끌려나오고, 그 속에서 어린 날의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쓰면서 어렸던 나를 위로하게 되고 비교우위에 있던 사촌의 입장도 생각해보고, 무엇보다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아파서 감아놓은 붕대를 건드리지도 않고 풀지도 않고 지냈는데, 막상 풀어보니 상처는 이미 아물고 새살이 돋아있는 경우처럼.
신기했다. 글쓰기의 자기 치유력, 자기효능감이 이런 것일까. 마치 종교적 체험처럼, 글쓰기를 통해 성장하는 경험, 과거를 넘어서는 경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 글을 쓰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다짐하고 부족한 점을 반성하는 나를 발견했다. 글쓰기의 힘이 이런것인가. 가슴께로 싸르르한 낯선 감각이 지나갔다. 글을 또 쓰고 싶어졌다.
사촌 글을 쓸 때 처럼 성숙의 경험이 있어 글쓰기가 소중하지만, 즐거움도 글을 쓰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글쓰기에는 글쓰기 자체가 주는 재미가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단어를 골라 문장이라는 매듭을 만들고 문장을 모아 문단이라는 직조물로 만들어본다. 그렇게 만든 문장과 문단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매끄럽게 연결하다보면 글이라는 옷이 완성된다. 그 과정이 힘겨우면서도 재밌다. 퍼즐을 끼워맞췄을 때 처럼 단어와 문장이 꼭 맞는 자리를 찾을 때, 기쁘고 만족스럽다. 좀 더 논리적인 언어, 합리적인 전개, 깊이있는 주제를 풀어낼 수 있는 문장력을 갖추고 싶다는 욕심도 생긴다. 아직 내 마음과 생각을 적확한 언어와 문장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쓸수록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글, 더 명확한 글을 쓰고 싶어진다.
변화가 없는 글은 지루하다. 소설 속의 인물이 갈등하고 번민하다 결국 성장하는 과정에서 감동받는 것처럼, 이야기를 읽으며 이전과 다른 곳에 도착해 있는 나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글을 쓰면서 변화하는 나를 느끼고 두근거렸다. 기쁨은 나누면서 더 크게 만들고 슬픔은 마주하면서 희석시킨다. 모두 글을 쓰면서 생기는 변화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니 글쓰기가 점점 더 좋아지고, 이젠 나도 모르게 내 주변을 돌아보며 글감을 찾고 있다. 나를 살펴보고 더 깊이 생각해보려 노력한다.
어릴 때, 어머니는 밥을 하면 주발에 담아 이불깔린 아랫목에 넣어두곤 하셨다. 온기가 오래 가도록, 따스함이 식지 않도록 살피던 어머니의 손길. 그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처럼 글을 쓰려는 마음을 소중하게 품어본다. 계속해서 쓰고 싶은 이유,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