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Jul 21. 2023

김신애 여사의 빨간 레이스 팬티

  "앞으로 고생 좀 하겠네.“


  내 결혼식이 끝나고 친정 엄마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일 많이 들은 말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처음 본 신랑 측 혼주의 눈빛이 남들 보기에 예사롭지 않았던 탓이다. 시어머니 자리가 사나워 보여서 새 신부의 결혼생활을 걱정해주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친정 엄마 속은 말이 아니었을 거다.     

 

  내 시어머니 김신애 여사는 어딘가 사람들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지닌 분이셨다. 요즘으로 치자면 환불원정대 모두를 합친 느낌이랄까. 실제 유능한 환불러시기도 했고. 아무튼,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이 신부 어머니에게 위로와 걱정의 말을 건넬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이지만 실은 다정......했으면 좋았겠다. 아쉽게도 반전은 없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김신애 여사는 보통 성미가 아니셨다. 두 며느리는 물론 두 아들도 어머니의 차가움에 여러 번 상처를 받았다.     

 

  한 번은, 어머니 옷을 선물로 사간 적이 있었다. 연한 그레이 빛깔의 스포츠 브랜드 외출복 상의였다. 마침 어머니가 외출 중이셔서, 아버님께 옷을 드리고 남편과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운전 중인 남편 핸드폰으로 어머니 전화가 왔다.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자마자 날카롭고 성난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디서 이런 걸 사왔냐! 내가 지금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려했다. 너는 이것도 옷이라고 돈 주거 샀다냐? 세상에나 색깔이, 색깔이 이게 뭐냐? 나 지금 노인네라고 무시 하냐? 어디 이런 걸 입으라고!”     

 

  대뜸 화부터 내시는데 남편은 얼음이 되어버려 아무 대꾸도 못하고 듣기만 하고 있었다. 처음에 아무 생각도 안 들다가 상대방이 너무 화를 내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문득 어머니가 진짜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화내시는 게 아니라 비싼 브랜드 옷을 사가서 내게 미안해하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남편은 오래도록 구직 중이었고 내가 외벌이로 생활하던 때라 항상 작은 아들네가 경제적으로 어려울까봐 마음 쓰시는걸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심장에서 튀어나갔다.     

 “그러게 어머니, 그거 어머니 작은 아들이 고른 색깔인데 마음에 안 드셨구나? 아이고 아들이 엄마가 좋아하는 색깔도 모르고, 너무하다. 아들이 잘못했네. 어머니 좋아하는 색깔로 살걸, 에이. 그러면 다음에 바꿀 테니까 일단 그냥 놔두세요. 다음에 가지러 갈게요.”     

 

  다행히 어머니는 내 얘기를 듣고는 금방 화를 누그러뜨리고 전화를 끊으셨다. 종종 시댁 얘기를 털어놨던 지인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다들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다. ‘대단하다’, 아니면 ‘너무한다.’ 어느 쪽이든 ‘고약한 시어머니’ 때문에 상처받는 며느리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대화가 끝나곤 했다.     

 

  


  

  그토록 드세고 사납던 김신애 여사가 그렇게 쉽게, 그렇게 빨리, 암에 질 거라고는 가족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병 따위는 오다가도 어머니 기세에 눌려 가버릴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 생각이 가족 모두의 착각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머니는 여름에도 잦아들지 않는 기침 때문에 병원 가셨다가 드라마처럼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권고를 들었다. 병원을 옮겨, 검사를 하고 항암을 시작하셨다. 폐암 3기였다. 치료를 시작하며 11월의 가지보다 더 메말라가던 어머니는 겨울이 다 지나기도 전에 끝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장례를 마치고 형님과 함께 유품 정리하던 날이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방과 집안의 온갖 물건들을 다 정리해서 버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어머니 삶의 흔적들을 치우다 옷장 안 쪽에서 뜯은 흔적이 남아있는 봉투를 하나 발견했다. 열어보니 의외의 물건이 나왔다. 속옷이었다. 하늘거리는 소재의 빨간색 팬티, 그것도 빙 둘러 레이스가 붙은. “어머, 어머니도 참.” 형님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얼른 팬티를 집어 도로 포장지 안에 넣었다. 어머니가 직접 산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누군가에게서 받은 선물 같았다. 그 빨간색 팬티를 어머니는 왜 입지 않았을까? 왜 다시 봉투에 곱게 담아 안쪽에 넣어두셨을까?

 

  “형님, 이거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형님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러라고 하고 다시 정리에 열중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포장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머니의 빨간 레이스 팬티를 내 가방에 넣었다. 대단한 유품도 아니고, 의미가 있는 물건도 아니며, 내게 필요한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옷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팬티가 버려지게 둘 수 없었다.       

 

  저 먼 바다 작은 섬에서 태어나 뭍으로 올라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던 어느 여자, 낯선 도시에서 두 아들을 키우며 억척스럽게 생계를 책임져왔던 어느 여자의 70년 인생이 순간 빨간색으로 변해 내 눈 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구멍 난 면 속옷을 기워 입으며 강하고 드세게, 사납게 살아야만 했지만 속에는 하늘거리는 빨간 레이스의 속옷도 담겨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순간에는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김신애’였을 것이다.      

  아랫도리에서부터 넘실대는 태양 같은 생명력과 성적 매력이 가득한 ‘김신애’ 여사를 상상하니 내 마음에도 불이 이는 것 같았다. 물어볼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오로지 나 혼자만의 망상일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속마음이 애틋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알 것 만 같아서 나는 그 빨간 팬티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팬티는 내 방 속옷서랍 안에 들어있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이 팬티를 입지 않고 잘 싸서 넣어두셨을지 여전히 궁금하다. 입으셨으면 잘 어울리셨을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 어머니를 추억하는 물건치고는 평범하지 않다 싶지만, 이것도 왠지 ‘김신애 여사’다워서 괜찮은 것 같다.        

 


 ps- 내 옷장에는 어머니를 추억할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색깔이 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쓰레기통에 버려 버리겠다던 그 옷, 결국 내가 가져다 지금껏 입는다.


인터넷에서 찾은 비슷한 팬티 사진


작가의 이전글 그저 평안을 빕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