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냉혹하지만 가장 필요한 조건은

누가 나를 돌볼까, 하는 불안

by 피어라

더위를 먹은건지, 냉방병인건지, 요며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우선 두통이 심했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두개골 안에서 뇌가 욱씬욱씬 거리면서 부풀었다 가라앉는 느낌이에요. 몸살하듯 온 몸의 근육통도 있었습니다. 진짜 두들겨 맞은 것 같더군요. 특히 어깨는 오십견 처럼 심하게 뭉쳐서 하루종일 파스를 달고있었죠. 거기에 가벼운 구토기도 있어서 내내 속이 메슥거리더니 결국 저녁에 게웠고요.


어제도 몸이 안 좋아 저녁 먹고 일찍 누웠는데, 난데없이 오한이 드는 겁니다. 삼복더위에 추워서 꼼짝을 못하겠는거에요. 간신히 긴옷으로 갈아입고 두터운 등산 양말 신고 이불을 꺼내 덮었는데도 으슬으슬 떨리더라고요. 타이레놀 두 알을 먹고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열이 올랐어요. 온 몸이 뜨겁고 열이 나서 끙끙 앓았어요. 한 시간마다 깰 정도였어요. 6시간 마다 두 알씩 타이레놀을 먹으며 버텼더니 한 상자 10알을 하루 반 동안 다 먹었어요. 다행히 열은 내렸고 몸 컨디션도 괜찮아졌어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저도 좀 놀랐어요.


그렇게 누워서 앓고있으려니 제가 요즘 읽었던 네 권의 책, [죽은 자의 집청소], [노화학사전], [사는 게 뭐라고], [그렇게 죽지 않는다] 가 떠올랐어요. 이 책들의 공통점은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죽어가는 지 죽음의 과정과 준비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읽을 때는 곧 내게 닥칠 부모님의 죽음을 대비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다각도로 죽음을 해석하는 책들을 찾아 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시들지 않는 통증을 겪으니 왜 이 책들에 깊이 공감하고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지 진짜 이유를 알게 됐어요. 사실은 내가 아플 때 아무도 날 돌봐주지 않을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던거에요. 내가 병들어 누워있으면 누가 나를 돌볼까 하는 불안,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남을 돌보는데 서툰 남편과 아들은 나를 제대로 못 돌볼거라는 불안. 그래서 죽음의 과정들이 더 두려웠던거고,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미리 해놔야한다고 생각했던거죠.


작년 11월 제가 퇴근길에 코로나 확진 판정 받고 돌아와서 바로 방 안에 격리했을 때, 우리집 남의 편은 나가서 운동하고 왔어요. 아이들 저녁이라거나, 아픈 사람을 챙겨준다는 건 나중 일이에요. 지금 자기가 하고 싶으면 일단 그게 최우선이에요. 지금까지도 그때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주장하죠. 격리해야하니 자신이 나가 있는게 맞다는거에요.


글쎄요, 저는 옳고 그르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시에야 제가 엄청 화내고 서운해했으니 말로는 제게 미안하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자신의 행동이 맞다고 믿는다는 걸, 남편도 알고 저도 알아요.

강요배 [황파]


꼬박 삼일을 앓고 몸이 회복되었어요. 그 동안 제 안의 불안과 체념을 마주했어요.

남편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나 해봤습니다.

"만약에 내가 거동을 못할 만큼 병으로 누워있으면 어떻게 할거야?"

남편은 별 고민도 없이 건조하게 바로 대답합니다.

"요양원에 보내야지. 병간호와 애들 케어를 둘 다 할 수는 없잖아."

그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은 연달아 말합니다.

"내가 아파도 똑같이 해줘."


그러니까 남편은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인게 아니라, 돌보지 않고 돌봄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인거죠. 기대도 하지 않고 기대받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겠지만 그 이상은 못한다고 확실히 선을 그어요. 내가 한 질문을 듣고 아마 내가 어떤 말을 듣고싶어하는지 알았을거에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에요.


할 수 있는 만큼 하겠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는 남편의 태도가 어딘지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어딘가 가벼워졌습니다.



고작 3일 앓고서 노년의 마지막에 어떻게 돌봄을 받을 것인지를 고민하다니, 비약이 심하다 싶기도 합니다.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고요. 정말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는다면 생각이 바뀔수도 있고 힘들게 투병중이신 분께 실례되는 얘기려나 싶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막상 내가 그 자리에 놓인다면 그때는 작은 온기에 삶이 바뀔 수도 있을테지요.


결국 인간은 모두 고독사라던 책 속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혼자서 죽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죽음을 향해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돌봄을 받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자식의 효심, 남편의 애정, 형제의 배려, 있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이건 최소한의 조건, 있으면 좋은 없어도 괜찮은 조건들입니다.


그 이전에 자신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의지와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할겁니다. 혼자서 맞이할 수 있는 멘탈과 돌봄노동에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 냉혹한 것 같지만 이게 가장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이 조건이 훨씬 더 어렵네요. 조금 슬퍼집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네게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