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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Aug 29. 2023

여름이 끝나기를 바랐지만 가을이 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샤워기 손잡이를 왼쪽으로 틀었다. 엊그제만 해도 에어컨 틀고 잠들었는데, 이제는 차가운 물이 닿는게 싫어 온수로 샤워를 한다. 사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그 적은 온도차에도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곳이 또 있다. 아직 찬바람은 불지도 않는데 벌써 입술이 건조해졌다. 버석해진 입술 끝을 손으로 뜯어냈더니 살짝 쓰라리다. 조금 있으면 본격적으로 눈이 간지럽고 콧물과 재채기가 나서 약을 먹어야한다.  잎이 물드는 것보다 몸이 더 빠르게 계절이 변화를 알아차린다. 비염인이 아웃팅 당하는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


   벌써부터 비염약 먹을 생각을 하다보니 내가 먹는 약들이 떠올랐다. 요즘 나는 하루에 평균 알약 다섯 개씩 먹고 있다. 먼저 눈이 안 좋아서 눈 관련 영양제 두 가지를 먹는다. 안구건조증 때문에 오메가3, 망막주름 때문에 안과에서 처방받은 혈액순환을 돕는 영양제, 해서 두 알. 남편 영양제 사면서 할인판매김에 곁들여 산 항산화 영양제 코큐텐 한 알, 비타민과 유산균 한 알씩. 총 다섯 가지다. 여기에 가끔 무릎관절과 다리저림 때문에 시서스나 셀레늄을 먹을 때도 있고 비염약이나 신경정신과 약을 먹을 때도 있다. 초기감기약이나 타이레놀류도 종종 먹고. 이런 상황이라 간이 쉴 틈을 주기 위해서 건강즙은 잘 안 먹는다. 알약과 알콜을 분해하는데만도 내 간은 넘치도록 일하고 있는 중일테니까.



   20대 때는 약을 먹어도 별 효과를 못 느꼈다. 영양제는 효과도 없는데 왜 먹는거야 싶었고, 비타민은 맛으로 먹는 건줄 알았다. 보약이건 피로회복제건 다 광고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제약회사들이 다 놀고있던 게 아니라는 걸.


   젊은 날 영양제를 먹고 보약을 먹어도 차이를 못 느꼈던 건 약효 탓이 아니라 내 안에 에너지가 가득해서였다. 90% 물이 가득한 컵에, 3, 4 % 물을 더 넣는다고 눈에 띄게 큰 차이가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30% 정도 찬 컵에 10% 만 물을 더 넣어도 확 불어난 양이 눈에 확연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몸의 기능이 떨어지고 기운이 쇠약한 지금은 약을 먹고 안 먹고 차이를 여실히 느낀다.


   4,50대 들이 영양제를 한 웅큼씩 먹는건 실제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약을 써도 몸이 쓰는 에너지가 차이가 확 난다. 오후에 피로할 때 비타민이과 홍삼즙을 하나 먹으면 커피 마신 것 처럼 반짝 기운이 난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다 쓰면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간다. 무슨 3분 간만 슈퍼 히어로로 변신하는 울트라맨도 아니고.(아, 너무 오래된 캐릭터인가? 울트라맨?) 운동과 식단관리는 힘들고 귀찮아서 내던져버리고 하루하루를 약물에 기댄체 보내는 내 모습이 가여워 보일 지경이다.


   이미 내 인생의 시간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제발 천천히 와라 가을아. 겨울을 좋아하는데 이젠 겨울이 반갑지가 않다.  춥고 배고픈 겨울이 아니라 따스하고 건강한 겨울을 만드려면 지금이라도 노력해야 할텐데, 한 발 내딛는게 너무나 힘들다.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한다고 알고 있는데, 손에 정답지를 들고 있는데도 실천을 안한다. 더위가 가셨으니 이제 조금씩 움직여보자. 제발. 언제나 가을 뒤엔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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