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Jan 22. 2024

멸치따위 죽어버려

멸치, 기억에서 사라진 -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립스틱도 공들여 발랐다. 전 남친 예식장에 가는 구여친 정도의 비장함은 아니었어도 평소보다는 좀 더 차림새에 신경을 썼다. 어쨌든 옛날 남자친구와 만나는거니까.

약속장소는 그 친구 덕분에 알게 되고 둘이 자주 찾았던 홍대에 있는 작은 바였다. 좁고 긴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몇 개 없는 테이블과 가늘고 긴 카운터, 어둑한 조명과 인디밴드들의 음악까지, 어두운 푸른 빛으로 꾸민 작은 공간은 여전히 내 취향이었다.

 마주앉은 사람은 그다지 달라진 점이 보이지 않았다. 둘 다 크게 어색해하지 않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작은 병맥주를 한 병씩 마시고 헤어졌다.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뭐였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분명 시덥잖은 이야기들이었을거다. 단 한 장면을 제외하고. 자리에 앉고 얼마되지 않아 기본 안주로 중간크기 멸치와 고추장이 나왔다. 별 생각없이 먹으라고 권했는데, 그 남자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 멸치 싫어하잖아."



 끝난 사랑은 멸치와 닮았다


 스물일곱에 만난 사람과 스물아홉에 헤어졌다. 최악의 이별이었다. 먼저는 오래전 첫 사랑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고 했고, 다음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양성애자인것 같다고 했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결혼할 수 없으니 헤어지겠다는 얘기였다.

지금이라면 미친놈, 하고 뒤도 안 보고 돌아설 거 같은데, 그때는 꽤나 힘들어했고, 구질구질하게 굴기도 했다. 어쨌거나 만나는 동안은 진심으로 좋아했으니까.

 헤어지고 나서 각자 연애를 했지만 활동영역이 겹쳐 몇 계절 정도 서로의 소식을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도 그때는 중요했던 그 병, 지나고나면 부끄럽지만 그때는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 병을 나도 앓았다. 이름하여 '쿨병'. 한때 좋은 인연이었고, 앞으로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이 궁금해서, 괜시리 연락을 했고(뭐하러!) 쓸데없이 약속을 잡았고(그러니까 뭐하러!!)  바보같이 만났다(다시 한 번 말한다, 뭐하러!!!) 그리고 멸치를 만난거다. 말라비틀어져 버석거리는 멸치, 바다의 흔적은 비린내로만 남은 멸치, 까맣게 죽은 눈동자가 자국으로 남아있는 멸치를.

 옛 연인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잘 지내라고 인사할 수 있다. 웃으며 또 보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순간이 조금 부끄럽다. 헤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 서로에게 중요했던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사이였는데 굳이 만날 필요가 있었을까. 심지어 무례하고 폭력적인 방식의 이별이었는데도 말이다.



진짜 부끄러운 이별의 핑계


 멸치를 싫어한다는 말은 듣고,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잠시 뒤 내 둔한 뇌가 삐그덕 대면서 어떤 의도에서 나온 말인가를 추측했고 뇌 한편에 치워둔 기억을 하나 끄집어냈다. 아, 이 남자는 멸치를 못 먹었다. 나는 멸치를 싫어하는 사소한 취향따위 까맣게 잊었는데, 이 남자는 내가 여전히, 당연하게 자신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한걸까? 그러길 바란건가? 어째서? 왜?

 멸치덕분에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별의 순간도 떠올랐다.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지난 사랑은 부끄럽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몇 마디 나눠보지 않아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겠구나 직감했고, 직감처럼 얼마 뒤에 연인이 되었다. 이전의 지지부진한 연애들은 열외로 친다면, 첫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랑이었다. 나의 진통제. 어느 날은 일기에 이렇게 적기도 했던 그런 사랑이었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은 조금 부끄럽다. 그냥 사랑이 식었어, 혹은 다른 사람이 생겼어, 라고 말했으면 되었을 것을 굳이 자신의 성정체성 운운하며 헤어지자고 말하는 방식으로 이별을 선고당했던 내가. 다시 생각해보자고 울먹일 것이 아니라 핑계대지 말고 솔직해지라고 소리쳐주지 못한 내가.


 덕분에 나는 작은 부끄러움과 함께 오래도록 술자리 안주가 될 이야기를 하나 얻었다. 누구나 듣고나면 남자를 비난했고, 비겁하다며 욕했다. 청중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쯤, 나는 술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 남자, 몇 년 뒤에 딴 여자랑 결혼했잖아."



이전 07화 갤럭시 울트라가 어떻게 생겼는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