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혜 소설 [자두]를 읽기 시작했다. 앞부분에 화자가 연인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말이 나온다.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라고. 늙은 아버지 눈에는 아들의 연인이 마냥 귀하고 어여뻐보였으려나.
남편과 결혼하기 전 남편의 부모님에게 처음 인사드리던 날, 남편의 집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떨리고 긴장되던지. 설렌다기보다 무섭고 부담스럽기만했다. 남편도 낯설었던 장거리연애시절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어찌저찌 연애하고 어찌저찌 부모님께 인사하기로 했던 쌀쌀하고 추운 겨울. 아끼던 겉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처음 부모님과 만나러 집에 갔는데, 부모님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부모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신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측정당한다는 느낌, 두 분이(특히 어머니가)나를 요모조모 따져보고 있다는 느낌만 남아있다. 이후로도 나를 환대한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다.
시부모님과 처음 만난 날의 인상처럼 결혼하고도 두 분은 내내 딱딱하고 차가웠다. 거짓말로라도 살갑고 다정하시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시어머니는 수시로 경계를 넘으셨고 시아버지는 무생물 같이 데면데면했다. 물론 여느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겉으로 내색 잘 못하시지만 속으로는 따스한 사랑이 차있었을거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아마 설날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직 걸음마도 못하고 누워있던 큰 애가 있고 거실에 음식냄새가 가득했고 뭔가 포근한 분위기였다. 상을 치우고 거실에서 느른한 햇살을 쬐며 앉아있는데 아버님이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를 꺼내셨다.
"처음 너이가 우리 집에 인사 오던 날, 그 전날 밤에 내가 꿈을 하나 꿨다."
워낙 말이 없으신 아버님이 갑자기 꿈 얘기를 하시길래 복권이라도 사셨다는 얘긴가 싶어 잠자코 듣기 시작했다.
커다란 돼지가 우리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 돼지가 집체만하게 큰데다가 맷돼지모냥 털이 누렇고 거칠거칠한거이 묘하게 생겼더라. 그래 복권을 사야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담날 네가 들어오는데 너 입고있는 옷이 딱 그 돼지 색깔이데. 그래 내가 속으로 됐다, 생각했다.
느릿한 아버님 이야기를 들으며 무어라 대꾸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때 무슨 옷을 입고 있었더라? 카멜색 후드 반코트로 모자에 인조털이 풍성하게 달린 옷이었다. 옷을 떠올리고도 대꾸를 못한 건 아버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서였다. 혹시 말로 꺼내놓은 적은 없지만 아들이 사귀는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며느리감으로 생각했다는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시는걸까?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 그저 웃음으로만 답해드렸다. 그래도 아버님이 나를 좋게 보셨다는 나름의 증거로 마음에 담아두었다.
그런데 오늘 저 구절을 읽으니 마음에 봄꽃같은 시샘이 피었다. 나도 봄꽃같다고 반겨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누군가의 환대로 봄꽃처럼 피어나고 싶다. 하지만 우리 아버님, 봄꽃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며느리 말고 커다랗고 투실한 돼지 며느리를 보셨구나. 지금처럼 살찔걸 아셨던건가. 어찌됐든 빳빳하고 거친 털을 지닌 커다란 돼지는 오늘도 열심히 일하며 가정을 책임지고 있다. 봄꽃처럼 화사하고 곱진 않아도 아버님도 튼튼하고 일잘하는 돼지 며느리를 예뻐하실거라 믿으며 살아보자. 꿀-꿀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