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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Nov 17. 2021

이름이 세 개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름이 두 개다.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셔서 집안에서 부르는 사적인 이름이 있고, 

주민등록상에 올라간 공적인 이름이 있다. 


‘윤희’와 ‘영희’. 

듣기에도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 드는 윤희가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70년대 교과서에서 등장할 올드하고 딱딱한 느낌의 영희가 밖에서 불리는 이름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는 윤희라고만 불리웠는데, 입학 전 날 부모님은 나를 앉혀놓고 이제부터 학교에 가서는 내 이름이 영희가 된다고 얘기해주셨다. 이상했다. 어째서 학교에 가는 순간부터 내 이름이 바뀌게 된단 말인가. 게다가 어린 마음에도 영희라는 이름이 내키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 이후 학교에서 이름 때문에 놀림도 받기도 했고 다른 친구들처럼 예쁜 이름도 아니어서 나는 법적인 내 이름을 좋아한 적이 없다. (도대체 초등생들은 왜 이름을 가지고 놀리느냔 말이다!) 

당연히 이름에 불만도 많았다. 하지만 이름을 바꿀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그저 주어지는 것, 원래부터 입고 있는 것,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인터넷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별명이라는 게 필요했다. 본명을 써도 상관없었지만 영희라는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쓰고 싶었다. 촌스럽고 구린 ‘영희’라는 내 본명대신 멋진 필명이 갖고 싶었다. 재치있고 쉽게 잊히지 않을 이름,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지는 이름을 만들고 싶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닌 내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이름.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막상 이름을 정할 때는 그간의 고민과 의지와 무관하게 즉흥적으로 지어버렸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름을 쓰라고 하는 문구를 본 순간, 몇 초 동안 이것저것 떠올려보고 바로 키보드를 두드려 만들어냈다.

 

피어라.


꽃이 피듯 활짝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피어라’라는 이름. 의지가 담긴 명령형의 이름, 피어라가 내가 정한 나의 세 번째 이름이 되었다.


물론 피어라가 인터넷에서 제일 처음 만든 이름은 아니다. 이전에도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져왔지만 내가 글을 쓰면서 의식하고 있는 첫 이름은 피어라다. 나는 내 본명보다 이 이름일 때 더 많이 글을 쓴다. 이 이름으로 내 얘기를 꺼내고 내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비록 온라인에서지만 ‘피어라’일 때의 나는 ‘영희’일 때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이 이름으로 글을 쓰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피어라’라는 이름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바로 책방꾸리기다. 십년 쯤 뒤, 퇴직하고 나면 지역에 작은 독립서점을 만들고 싶다. 인테리어 센스도 엉망이고 커피도 문외한인지라 애초에 북카페 같은 공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책들로 큐레이션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면 된다. 소박하지만 책방으로써의 역할과 지역의 문화공간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 작가와 함께 북토크도 하고 독서동아리를 꾸려 함께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모인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쓰는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퇴근길에 들러 부담 없이 책을 보다 가도 되는 책방, 엄마가 아이와 함께 손잡고 찾아 올 수 있는 책방, 중고등학생들이 참고서와 문제집이 아닌 책을 골라볼 수 있는 책방이 내가 꿈꾸는 책방의 모습이다.      



책방 이름도 벌써 지어 놨다. 

“책피다.”

 책을 펼친다는 의미와 꽃이 핀다는 의미를 같이 담았다. 책속에 꽃이 피어나고 책과 함께 삶이 피어나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이다. 문법적으로 어색하더라도 의미를 담은 이 이름이 마음에 든다. 책방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전면 유리창의 책방 주인이 된 양 절로 웃음이 나고 행복해진다. 이런 책방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은 육아와 살림, 직장 일에 치이는 초라한 중년의 아줌마지만, 책방의 꿈을 꿀 때면 마음이 설레고 생기가 넘친다. 경제적인 면이나 기타 구체적인 준비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나머지 반만 준비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우선은 열심히 꿈이라도 꾸고 있는 중이다. 비록 남편은 내 꿈에 경제적인 이유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십년 쯤 지난 뒤에는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 날을 위해 부지런히 좋은 책을 골라 읽고 조금씩 글을 써보며 내공을 쌓고 있다. 언젠가 내 세 번째 이름 ‘피어라’로 책방에서 책방지기로 활약할 날이 올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책피다’의 책방지기 피어라입니다!”라고 책방을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 이제 돈만 모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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