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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Nov 21. 2021

1년 전과 1주일 뒤 다크 결혼기념일

'가족의 탄생'


 결혼 몇 년차인지 세지 않은지 꽤 됐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으니 15년이 넘은 것은 확실한데 정확히 몇 년째인지는 모르겠다. 아직 20년은 안 된 듯하다. 결혼기념일이라지만 딱히 '기념'하지는 않았다. 결혼기념일에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근사하게 차려입고 데이트 하거나, 둘 만의 여행을 가거나,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선물을 나누거나, 뜨거운 밤을 보내거나(......), 이런 것은 하등 우리 집과는 상관없는 남의 집 얘기였다. 공식적으로 그날 하루 저녁을 안 차려도 되는 편한 날, 즉 외식하는 날 정도일 뿐이다. 


 올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남편이 여기저기 동네 맛집을 검색해 보며 “여기 밥 먹으러 갈까?”"여기는 어때?"하며 물어보았다. 결혼기념일 전 날 저녁이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 건성으로만 대답하고 확실히 약속을 정하지 않은채 출근했다. 


그 날 오후 우연히 웹에서 결혼기념일을 자기 가족의 탄생일로 온 가족이 다 함께 축하한다는 글을 봤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며 가족을 이루게 되는 시작을 기념하는 것.’ 

오, 나름 의미있고 멋져보였다. ‘그래, 올해는 우리도 가족의 탄생일로 뭔가 기념일을 기념해보는거야!’ 결심하고 퇴근 전에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데리러 와요~~~.”

 

어디 숨어있는지도 몰랐던 애교를 꺼내 콧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돌아오는 남편이 첫 마디에 올라갔던 입꼬리가 바로 내려왔다. 


  “안돼, 나 점심에 맥주 한 잔 해서 운전 못해.”


아니, 결혼기념일에, 저녁에 어디 외출할지도 모르는데,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 술을 먹나? 게다가 술 마셔서 데이트도 못한다고? 남은 기껏 가족의 탄생일로 축하할 마음을 먹었느데, 무슨 남편이 이래! 자기만 생각하고! 라고 속으로만 미친듯이 퍼붓고,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퇴근했다. 


외식하는 줄 알고 엄마 퇴근만 기다리던 아들들은 들어서는 엄마의 싸늘한 표정을 보고 알아서 방으로 들어갔고, 민망하게 웃으며 다가오던 남편은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말 걸지마, 만지지도 말고 나 건드리지 마.” 


얼굴도 안 보고 내뱉고는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혼자서 금요일 밤을 보내고 토요일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혼자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자니 어제의 짜증과 서운함이 가라앉고 비로소 뇌가 정상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가족의 탄생’은 나 혼자 설레서 떠올린 생각인거고, 아들들과 남편은 전혀 떠올리지도 못했을텐데. 너무 일방적이었구나.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쳤구나, 싶은 생각이 그제사 들었다. 방문을 열고 나와보니 두 아들은 이미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작은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말을 꺼냈다.


 “엄마 결혼기념일인데 축하 받고 싶었나봐. 아무도 특별하게 생각해주지 않아서 서운했어.”

 “엄마, 결혼은 둘이 한건데 왜 우리가 축하해야해?”


아…….물론 그렇지. 그러니까 가족의 의미에 대해 소중함에 대해 같이 나누고 다독이면서 공감대가 형성된 다음에야 말할 수 있었던 것인데, 나 혼자 너무 앞서갔구나. 다시 한 번 깨우쳤다.


 “맞아, 둘이 한건데, 엄마 아빠 둘이 결혼해서 비로소 너희가 태어나게 된거니까, 이왕이면 같이 축하하고 기념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우리 가족의 첫 시작이잖아. 그러면 어떨지 한 번 생각해봐.”

 “알았어, 근데 엄마, 배 고파.”


그래, 내 배 고픈게 제일 큰 일이지. 역시 우리 식구 중 제일 쌀쌀맞은(!) 작은 아이다.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여전히 눈치 보고 있는 큰 아들에게 돌아서는데, 먼저 말을 건넨다.


 “내년에는 내가 수업 끝나고 엄마 오기 전에 케익 사 올께요. 엄마 기분 풀어요. 엄마 삐지면 하루가 망한단 말예요.”


엄마 감정에 하루를 망한다고 말하는 큰 아들을 보며 엄마 혼자 생각에 빠져 다른 사람들 처지와 상황에서 생각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뒤늦게 화악 올라왔다. 


 “그래, 고마워. 엄마가 기대할게. 티비 보고 있어, 아침 먹자.”


웃으며 대꾸해주니 그제사 아들 둘이 씨익 웃는다. 

다크다크한 결혼기념일이 가고 블링블링한 다음 날이 찾아왔다. 내년 결혼기념일까지, 가족에 대해 더 소중히 생각하고 더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정의 문화를 만들어 가도록. 아마도 1년 안에 해결될 수 없는 장기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분명 의미있는 시도들이 쌓이면 단단한 공동체로 서로의 마음이 잘 엮여있을거다. 그때 다시 기념해보자. 가족의 탄생을. 





여기까지가 작년 결혼기념일에 있던 일이다.

누군가는 내 발등을 내가 찍은 날인데 뭘 기념하고 뭘 축하하냐고 농담으로 말하는 결혼기념일.

가족의 탄생이라고 혼자 설레발치고 들떠있다가 현실에 부딪히고 짜게 식었던 날.

일년 동안 가족의 마음을 잘 다독이며 지내보자고 결심했던 날.

그 날이 벌써 1년 전이다. 그 사이 1년이 지나 일주일 뒤면 열 몇 번째의 결혼기념일이다.



결혼을 기념하고 부부가 된것을 부러 축하하기엔 매일 같이 얼굴 마주하고 사는 사이에 너무 새삼러워서 별다른 이벤트는 할 생각이 없다. 그저 갖고 싶던 소소한 물건을 이 핑계로 하나씩 장만하려고 한다. 남편은 안경, 나는 귀걸이로 진즉부터 정해놓았다. 사실 이 선물만 아니었으면 날짜로 생각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도 특별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배달음식으로 저녁만 해결해야지. 


사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에게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기라고 배웠다. 엄마아빠 생일은 물론이고 부모님이 결혼하셔서 우리가 가족이 된 것이니 자녀가 부모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이 당연하나는 게 부모님 생각이었다. 거기에 내 생일에도 부모님이 고생하여 내가 태어난 것이나 생일날은 생일선물을 생일자가 받는게 아니라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인 것이 마땅하다고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최소 정서적 아동학대(?)나 최대 동심파괴(!!!) 쯤은 되는 것 같다. 


그런 기억 때문에 아이들로부터도 축하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 내 욕심이라는 것을 작년에 깨달았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다. 브런치 글을 보니 리마인드 웨딩이나 재혼프로포즈를 하는 부부도 있던데, 우리 부부는 그런 사이도 아니고, 남편이나 나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늦은 나이게 결혼과 출산을 한 덕에 뒤늦게 아이들 뒤치닥거리하며 고생하고 있는 우리 부부가 기특해서라도 선물은 하나씩 하고 밥도 든든하게 맛난 걸로 잘 먹을 예정이다. 우리의 결혼기념일, 가족의 탄생일은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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