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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13. 2021

아침으로 먹는 시리얼이 불편한 이유

<이미지는 켈로그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탕수육을 먹을 때 부먹파와 찍먹파가 나뉘는 것처럼 씨리얼을 먹을 때도 파가 나뉜다. 우유를 붓자마자 바삭하게 먹는 ‘바삭파’와 담궈서 부드러워진 다음에 먹는 ‘눅눅파’다. 나는 어느 쪽인가하면 처음에 바삭하게 먹다가 먹으면서 눅눅해진 맛을 즐기기 때문에 바삭과 눅눅을 모두 즐기는 ‘중도파’ 혹은 ‘다 맛있어’파 정도 되겠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혼자 시리얼을 먹었다. 식구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고, 출출하지만 밥을 차려 먹기는 귀찮아서 만만한 시리얼을 꺼냈다. 내가 시리얼을 먹는 것은 간식이라 괜찮지만,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은 또 달랐다. 처음 아이들에게 시리얼을 아침으로 내 놓았을 때, 나도 모르게 “미안, 오늘은 시리얼 먹고 가자.”라고 말했었다. 굶고 가는 것 보다 낫다고 자조하지만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이지 못한 불량엄마가 되버린 것 같았다.


큰 애가 초등 저학년까지는 아침에 일어나 삼계탕을 끓이고 밥을 볶아 오무라이스에 장식까지 꽂아줘가며 밥을 차렸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아이들이 먹을 아침밥을 정성으로 만들고 매일 메뉴를 고민하며 준비했었다. 음식재료도 신경쓰고 고른 영양소를 섭취하도록 노력했다. 카레 하나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채소를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잘게 다져서 만들었다.


그러던 것이 아이가 커 감에 따라 많이 느슨해져서 아침으로 3분이면 완성되는 인스턴트 카레나 짜장도 내놓고 빵과 시리얼도 내 놓게 되었다. 말은 하루에 필요한 영양분이 들어있다지만, 그건 극히 소량이고 대부분 설탕에 칼로리만 높은 과자일 뿐인 시리얼. 그나마 우유와 함께 먹는다는 생각에 급할 때 일주일에 한 번씩은 아침으로 내 놓고 출근했었다.


친정엄마는 아침에 시리얼을 먹여 학교 보낸다는 말을 듣고는 펄쩍 뛰셨다.’ 밥을 먹여야지 에미가 돼서 그게 뭐냐’고 내 앞에서 내 흉을 보셨더랬다. “햄버거, 피자, 콜라, 떡볶이 다 되는데 시리얼은 안 될 이유가 없잖아요!” 하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아침엔 따뜻한 밥에 국이라는 엄마의 지론을 꺽는 것은 내 내공으로는 무리, 차라리 감정에 호소하는게 잔소리를 줄이는 방법이다.


 “엄마, 나도 알지. 그런데 아침에 출근하느라 바쁘잖아. 애들도 입맛없을 때 간편하게 먹고 갈 수 있어서 가끔 먹여요.”


하면서 워킹맘의 피로를 호소하면 주제는 금방 ‘돈 벌며 자식 키우는 기특하고 짠한 내 새끼’로 돌아서기 때문에 엄마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시리얼은 어디까지나 대용품이지 밥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 집은 시리얼을 먹는 횟수와 양이 잦고 많다. 아무리 성장기라지만 살이 많이 찐 큰 아들을 위해 한동안 시리얼을 사다놓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 시리얼을 찾아 먹는 탄수화물 중독 증상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작은 아들이 걸렸다. 입이 짧아 밥을 안 먹는 작은 아들은 시리얼이라도 먹겠다며 찾아서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다시 사다놓고 있다. 안 사다놓자니 작은 아들이 걸리고 사다놓으면 큰 아들이 걸리는 상황이다. 현명하게 잘 조절하고 싶은데 장 볼 때마다 갈등이 된다.

마트 진열대위의 각종 시리얼들

원체 요리를 싫어하고 부엌에 들어가 있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지라 애들이 자라고 나선 잘 해먹였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그럼에도 시리얼을 먹이는 것에는 왜 부족한 엄마인듯한 자책감이 드는 지 모르겠다. 매일 삼시세끼 먹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두 번 먹는 것인데 말이다. 공장에서 만든 음식을 사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면 자주 먹는 햄이나 가공식품류도 같은데 왜 유독 시리얼에만 그럴까.


이미 답은 알고 있다. 엄마의 정성과 노력이 간편성에 반비례한다는 자신의 검열때문이다. 먹는 것은 대충할 때도 있지만 아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다른 것들을 잘 하고 있다면 이런 자책감이 안 들텐데, 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서적인 부분, 학습적인 부분, 사회적인 부분에 있어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다. 단순히 시리얼 때문이 아니라 시리얼을 통해 육아에 대충인 내 모습이 떠올라서 스스로 찔려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엄마였고, 학습에 게으른 엄마였으며, 아이의 사회적인 관계에 둔감했었다. 이로 인해 아이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아이가 곧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지 못했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행동들은 나 자신에게도 상처로 남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내게 온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런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지나친 자책감이나 부정적인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부러 무리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괜한 우울이나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까짓 시리얼 좀 먹인다고 남들한테 나쁜 엄마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자신에게 눈치를 주느냔 말이다. 이런 엄마와 만난 네 운명이란다, 하고 되받아치는 뻔뻔함도 필요하다.


나도 엄마가 처음인데 아이 키우다 실수할 수도 있는 거다. 아이들은 엄마의 실수와 잘못 속에서도 성장한다.  상처 받아도 잘 자란다. 더 여물어 지면서, 더 단단히 자라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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