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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Sep 19. 2022

놀이터의 개선장군

그때 그 놀이터에서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국민학교 3,4,학년 쯤 되었던 것 같군요. 그때는 지금처럼 학원을 많이 다니던 때가 아니라 저도 여느 꼬맹이들처럼 학교가 끝나면 작은 놀이터에서 늦게까지 놀곤 했습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만지면 손에 쇠비린내가 배는 정글짐에서 뛰어다니다가, 삐걱거리는 낡은 그네도 탔다가, 미끄럼틀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며 놀았습니다. 놀이기구가 심심해지면 미끄럼틀 밑에 모여 모래를 파헤치기도 했지요.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다 그렇듯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고, 귀 옆으론 꾀죄죄하게 땟국물이 흘러내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놀이터에 보호자인 어른이 항상 아이들을 지켜보지만 그 시절 놀이터에는 아이들 뿐, 어른이 없었습니다. 놀다가 생기는 아이들 간의 갈등과 다툼은 아이들끼리 해결해야했습니다. 대부분 덩치 크거나 목소리 큰 쪽이 이겼지요. 하지만 엄마가 집에 있는 아이들은 싸움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불러올 수 있는 든든한 원군이 있었거든요. 싸움이 날라치면 집 창문을 향해 “엄마!”하고 외치기만 하면 됐습니다. 형제자매가 있기라도 하면 얼른 집으로 들어가 엄마를 데리고 오기도 했죠. 그러면 지는 쪽은 항상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잘잘못을 정확히 가리기도 전에 성난 어른의 얼굴을 보면 상대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 절로 고개가 수그려졌는걸요. 저는 항상 사과하는 쪽이었습니다. 엄마는 시장에서 늦게까지 장사를 하셔야했으니까요. 당당하게 엄마 손을 잡고 온 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저를 가리키면 심장을 귓속에 구겨 넣기라도 한 듯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떨리고 불안해했는지 모릅니다.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억울했던 기억이 많았습니다. 나도 엄마가 있는데. 우리 엄마도 놀이터에 와서 내 편을 들어주면 좋을텐데. 생각만 해도 서럽고 눈물이 흘렀지만, 엄마는 한 번도 놀이터에 온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올 수가 없었던 거지요.      


어느 날이었을까요. 아마 이사하던 날이었던 듯싶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집에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큰엄마가 집에 계셨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오후에 어른이 집에 있다는 사실은 조그만 꼬맹이 가슴에 큰 바람을 집어넣어주었습니다. 평소의 소심하던 태도와 달리 놀이터에서 목소리가 절로 커졌을 겁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두려워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맞섰어요. 싸움을 피하기는커녕 분명하게 외쳤습니다. “우리 큰엄마 한테 이른다! 나도 집에 큰엄마 있거든!” 사실 엄마가 아니라서 약간 민망했지만 그보다는 불러올 내 지원군이 있다는 점이 더 기를 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큰엄마에게 뛰어갔습니다. 지금까지도 큰엄마한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 건 이 날의 기억 때문입니다. 제 얘기를 듣더니 큰엄마는 누가 그랬냐면서 저보다 더 크게 화를 내시며 제 손을 잡고 놀이터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꾸짖으면서 제 편을 들어주셨어요. 제 평생 놀이터에서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적은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분명 사소한 시비, 별거 아닌 작은 일이었을 테지만 그 날은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무죄판결을 받아낸 변호사라도 된 양 기쁘고 당당했었습니다.       



제가 만일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자신감이 붙어 당당한 태도를 지닌 어린이가 될 테지만, 평범한 어린아이에게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지요. 한 번의 경험으로 특별히 자존감이 높아지거나 놀이터에서 제 발언권이 강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후로 큰 목소리를 내 본 기억이 없는걸 보면요. 그래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따금 내 편이 되어준 어른의 존재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자신만만했던 그 날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나보다 덩치 큰 상대를 향해 고개 들고 외치던 흥분, 믿는 구석이 있을 때 나오는 단단함도 같이요. 다시 또 그렇게 누군가를 향해 내지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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