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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m Sep 03. 2023

오이지 세레나데

집밥 일기


우리 집은 동네 가장 첫 번째 건물이었다.

사람 둘이 들어가도 남을 만한 항아리에는 뽀얀 막걸리가 채워져 있었다. 손잡이 긴 플라스틱 바가지로 손님들이 갖고 온 주전자에 원하는 만큼 채워주는 거래가 이루어졌고 그 외의 물건들도 제법 갖춰진 마을 슈퍼였다. 파는 술 보다 마시는 양이 더 많았던 슈퍼 아줌마.

대문을 열고 마당을 걸어 계단을 올라가면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던 거실, 하늘하늘 연보라 커튼, 커피색 바탕의 검은 꽃무늬 소파가 보였다.

옥상.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제법 있었다.

간장 게장을 꽤나 자주 먹었던 기억으로 부엌에 두는 게장 항아리는 유독 작고 윤기가 났다.

그런 영향인지 지금 내 살림에는 2개의 항아리가 있다. 하나는 소금독이고 하나는 다용도로 사용한다.

오이를 절일 때 물항아리를 올리는 방식. 내가 나를 칭찬한다.










4계절 식재료로 가장 애정하는 오이는 우리 집 밥상에서 자주 보게 된다.

씻어서 그냥 먹어도 맛있고 새콤 달콤 무침도 좋다. 부추랑 양파 넣고 소박이는 또 어떻고.

구입하기 편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여러모로 쓸모 있는 녀석이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오이지용 오이를 반접씩 두어 번 사서 오이지를 담근다.

유난히 가늘고 길이가 짧은 오이는 오이지 전용 오이로 분류가 되는데 50개씩 진공 포장되어 생산자의 이름까지 붙여져 나름 까다롭게 판매가 된다. 농산물이 대량으로 활발하게 유통되는 판매점에 가보면 그 많고 무거운 오이. 조금 더 실한 놈 갖고 가시겠다고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 하시는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민스럽지 않은 대목에서 심각해지는 그분들의 표정이 무척 흥미롭다. 가장 베스트는 노부부의 옥신각신 되시겠다.

나에게 당첨된 우리 집 오이는 굳이 꼭 쭈그리고 앉아 오이에 붙어있는 불순물을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내고 때타월로 전체를 매끈하게 밀어 놓는다. 물론 새 때타월.

맛있는 오이지를 먹고 싶은 마음에 이깟 과정 따위는 전혀 귀찮지가 않다.






김장용 비닐이나 오이 50개를 담을 수 있는 비닐에 소금, 설탕, 식초를 같은 비율로 넣고 일주일 정도 쟁여두는데 이 과정에서 물항아리가 투입된다.

제대로 된 삼투압은 오이보다 무거운 항아리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마루인형과 종이인형 놀이를 무척이나 즐겨했던 나는 여름만 되면 마당에 돗자리를 깔았다.

혼자도 좋고 친구와도 좋고 매일 했었다.

오후가 되어 옥상으로 올라가면 동네 사람들의 오고 감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그 당시는 모든 가정에 자동차가 없었고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집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아줌마,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 오빠들, 은행가는 아저씨.. 무슨 용기였는지 아는 이웃이 지나갈 때면 나의 존재를 알렸고 그들은 하나같이 "위험하니까 내려와"라고 외쳤다.

게임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우리는 그렇게 지냈다.



"마트에도 팔아 오이지'

"반찬가게에서 사다 먹어"

"저걸 도대체 왜 하는 거야?"


마트에서 파는 오이지와는 식감부터 다르다.

오독오독 씹는 맛이 70%의 지분을 차지하고 화려하지 않게 무친 양념맛이 나머지 몫이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엄마와 나는 신기할 정도로 입맛이 닮아 있었다.

게장 좋아하고 생선 환장하고 오이지와 무장아찌는 열일 제치고 담가야 하는...

거의 나 혼자만 먹는 오이지를 50개씩 두 번이나 담그는 이유에는 나눔이 있다.

그 해 첫 번째 담근 오이지는 누구나 반기는 밑반찬으로 완성되기 무섭게 5개씩 10개씩 나눠준다.

그나마 내 옆에 계셔주는 이웃과 나의 지인들에게.


체중이 50kg을 넘은 이후 기운 빠지는 한 여름을 제외하고는 입맛 없는 날이 거의 없다.

그런 여름에는 백숙도 소용없고 장어를 먹어도 속만 더부룩하다. 바로 그때 차가운 보리차에 뜨거운 밥 말아 오이지 얹어 먹는 그 끼니가 나에게는 라벨 없는 보약이다.




크게 어려운 레시피도 아니고 몇 번 번거로운 후에는 김장 전까지 먹을 수 있는 가정식 반찬이 자동으로 저장된다. 한 두 개씩 꺼내어 그때 그때 무쳐먹으면 얼마나 맛깔스러운지.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수분이 빠지고 충분히 쪼그라든 오이의 또 다른 모습에서 이미 그 맛이 연상된다는 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밥상은 저장반찬 한 두 가지가 올라와줘야 균형이 잡히는 것 같다.


적은 양이라도 오이를 사서 변화되는 과정을 살피고 음식으로 완성되는 찰나를 즐겨 보시라.

식물이 자라 잎이 나오고 꽃이 피는 반가움과는 또 다른 맛이 난다.

그것이 진정 오이지 세레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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