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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 Sep 22. 2021

나에게 내미는 손

<호텐스와 그림자> x <이상한 엄마>

“엄마 맞아요? 근데 왜 애를 울려?”

“제가 울린 거 아니거든요.”

“지금 그게 울리는 거지 뭐야.”

“그냥 가시던 길 가세요.”


그날은 첫째 아이 하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갓 7개월 된 둘째가 유모차 안이 답답했는지 한참을 찡찡대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벌써부터 울면 어쩌나. 나 역시 울상이 되어 아이 앞에 쭈그려 앉아 달래고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한 파마머리 아주머니가 멀리서부터 쯧쯧 거리는 표정으로 걸어오더니 아예 지나가던 길을 멈춰 섰다. 내가 마치 아이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양 일그러진 얼굴에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애를 왜 울리냐고 물어왔다. 엄마임을 확인하자 더 이상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나와 아이를 계속 번갈아 쳐다보는 아주머니. 아이를 달래 보려고 브레이크를 풀고 유모차를 왔다 갔다 밀기 시작하면서 아주머니와 조금씩 멀어졌는데도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나가는 또 다른 여성도 그 아주머니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계속 우리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걸어갔다. 무슨 아이를 학대하는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쏘아보던 그들의 눈길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첫째 아이를 보자마자 방금 전 엄청나게 억울한 상황이 있었다며 아이에게 마구 쏟아놓았다. 엄마가 울린 거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열변을 통하는 나에게 맞장구를 쳐주는 아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엄마의 마음 따위 알 리가 없는 둘째는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얕은 울음소리를 계속 내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이나 그 아주머니의 말투와 표정이 생각나서 혼자 씩씩대다가 퇴근한 남편을 보자마자 또 하소연을 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냐며. 애가 우는 거지 내가 무슨 애를 울리냐며. 엄마 앞에서 애가 울 수도 있지. 엄마는 애 절대로 울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점점 더 열이 받고, 남편은 발끈대는 날 가만히 토닥토닥해줬다. 


첫째 아이 때도 지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면박을 받은 적이 많았다. 애 추울 텐데 모자는 왜 안 씌웠냐, 양말은 왜 안 신겼냐, 주로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하도 여러 번 들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흘려듣곤 했는데 왠지 이번에는 오랫동안 분이 가시지 않았다. 왜 그런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엄만데 왜 그 모양이냐’는 시선이 내 심기를 건드린 게 아닌가 싶다. 엄마라면 모름지기 아이가 울기 전에 모든지 척척 알아서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난 하늘이 우는 걸 못 봐. 배고파 보이면 먹을 것 주고, 졸려하면 재우고. 대체 울릴 일이 뭐야. 그렇게 순할 수가 없는데.” 

늘상 이렇게 말씀하시는 친정 엄마 앞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도 떠올랐다. 나는 진짜 엄마도 아닌가. ‘무슨 엄마가 그래?’ 엄마가 되고 나서 나를 둘러싼 세상은 자주 이렇게 묻는다. 어느 순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이 말이 나는 꽤나 거슬린다.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머릿속에 껌처럼 찰싹 들러붙은 이 말이 좀 떨어져 나갔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다. 


나탈리아 오헤라, 로렌 오헤라 지음<호텐스와 그림자>


<호텐스와 그림자>에서 호텐스는 다친 늑대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따뜻하고 용감한 소녀다. 하지만 싫어하는 게 딱 한 가지, 바로 자기 그림자였다. 어딜 가나 따라오고 무슨 일을 해도 따라 하는 그림자. 밤에는 아주 크고 검고 섬뜩해지는 무서운 그림자는 감추려고 할수록 더 고약해진다. 그림자에게 “난 네가 싫어!”라고 외치는 호텐스. 간신히 그림자로부터 벗어났지만 한밤중 찾아온 도적떼로부터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결국 자신의 그림자가 나타나 구해준다. 마침내 그림자가 자신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호텐스가 그림자에게 손을 내밀자 그림자도 손을 내민다. 


나도 그렇게 나의 그림자에게 언젠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어쩌면 과도하리만치 강한 책임감을 갖고 살아온 나는 맡은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참 견디기 힘들었다. 재작년 직장에서 도대체 내 역할이 뭐냐며 신랄한 피드백 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두고두고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었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답장을 썼던 기억이 난다. 너무 일찍 맏이가 된 탓일까? 과도하게 역할에 몰입하면서도 내 속마음을 잘 표현하는 데는 서툴게 된 것이. 동생에게 늘 양보하는 착한 언니가 되어야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단 걸 본능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하늘이만 봐주니까 나도 숙제하기 싫어!”

어릴 때부터 자기 마음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첫째 아이를 보면 양가감정이 들 때가 있다. 늘 감정을 억누른 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온 내게 첫째 아이의 입에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감정 상태가 나오는 걸 들을 때면 아이가 참 부러워진다. 속으로 끙끙 앓을 일이 없으니 세상 살이 얼마나 편할까 싶다. 그렇게 키우려고 노력한 결과니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아이를 보는 시선이 곱지가 않다. 어떨 땐 몹시 얄밉기까지 하다. 너는 참 할 말 다 하고 사는구나. 참 속도 편하겠다. 아이를 보면서 내 안의 검고 섬뜩한 그림자가 점점 더 커지고 고약해진다. 나는 아빠한테 한 번도 요구란 걸 해본 적이 없이 컸는데 아이는 외할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말도 잘한다. ‘할아버지, 제발 기침할 때 팔로 막고 하시라니까요.’ 하기도 하고. 


무한 책임감에 감정 표현 못하는 나란 사람은 그래서 더 사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30대 초반, 이직한 직장에서 적응하는 데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사수가 나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을 자로 잰 듯 정확히 이야기해주는 데 어찌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경력으로 들어왔는데 일은 잘 모르겠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만날 밤늦게까지 해도 일은 네버엔딩이지. 이 놈의 사수는 계속 혼내면서 다시 해오라 고만 하지. 몸은 피곤해 죽겠고. 무진장 서럽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지 모르겠고. 그렇지?” “네!”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꾹 삼키고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있단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알아준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처음 느껴봤던 것 같다. 


백희나 <이상한 엄마> 중에서


오랫동안 나 스스로를 알아주지 못하며 살아왔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첫 아이 육아 휴직이 끝나고 복직 후, 유능한 직장인도 좋은 엄마도, 어느 역할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마음의 짐이 늘어갈 때쯤 우연히 그림책 한 권을 만났다. 아이에게 읽어 주려고 샀던 백희나 작가의 <이상한 엄마>. 대체 어떤 엄마길래 이상하다고 하나. 호기심이 일었다. 아이가 아파도 발을 동동거리며 친정 엄마한테 전화해야 하는 호호 엄마가 나의 모습과 겹쳐지더니 생뚱맞게도 하늘에서 내려온 우스꽝스러운 선녀가 엄마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다니. 그런데 이 선녀 생긴 것과 달리 너무 다정하다. 아픈 아이를 위해서 속이 뜨끈해지는 달걀국부터 시작해서 집안을 따뜻하게 덥혀준 달걀 프라이, 천상의 편안함을 선사하는 구름 침대, 거기다 깨어 보니 산채만 한 오므라이스까지. 마지막 장면에서 날개옷을 호호네 집에 걸어두고 구름 타고 홀연히 올라가는 선녀의 뒤태를 보고 나와 아이는 빵 터지고 말았다. 아 정말 끝까지 큰 웃음 주고 가는구나. 내복만 입고 가버린 선녀여. 


그런데 책을 덮을 땐 입은 웃고 있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선녀가 마치 나에게 꼭 완벽한 엄마가 아니어도 된다고 토닥여 주는 것만 같았다. 엄마라면 아픈 아이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일 테지만 늘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래도 아이는 날 여전히 사랑한다고. 그리고 회사에서도 너무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줬다. 아픈 아이 때문에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등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뛰쳐나가도 괜찮다고. 그래도 나는 직장인으로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 나를 언제나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SOS 치면 언제든지 내려와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나의 필요를 알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채워줄 테니. 유쾌한 웃음 속에 나에게 내밀어 주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좀 부족하고, 좀 허술하고, 또 좀 이상하면 어떤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하면 됐지. 엄마 노릇도 잘 못하고, 맡은 업무를 잘하고 싶어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직장인이지만 어떤 모습의 나이 든 내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림책을 그 후로도 많이 만나게 됐다. 그때마다 내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이 조금씩 덜어지고, 내 편이 되어주는 든든한 친구를 만난 듯 가슴이 벅찼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친구에 기대어 글쓰기도 해보면서 내 마음을 더 알아주려 한다. 함께 깔깔거리고 춤까지 추지는 못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내 곁에서 살아갈 그림자야, 이제 네가 거기 있단 걸 알아줄게. 그렇게 조금씩 용기 내어 손을 내밀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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