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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경 Oct 09. 2024

웨스트 뱅크 신사!

West Bank Gentleman!

1993년, 오슬로 평화 협정이 체결되며 1994년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긴장이 남아 있었고, 


특히 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 지역의 경계는 늘 삼엄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가려면 감람산을 넘어야 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이 같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곳이기에 항상 긴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넘나드는 교통편은 정말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웨스트뱅크로 가려면 한 사람당 1셰켈을 주고 탈 수 있는 택시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렌지색 작은 카드를 보여줘야 하고 벽에 팔을 붙이고 서서 온몸을 검사받고 또 택시를 타고 넘어가야 했다. 

때로는 그 경계선에서 우리 같은 외국인들도 벽에 손을 대고 서 있는 것을 많이 봤다.




우리 가족은 6개월 동안 창고를 개조하여 만들어 사용한 우리의 보금자리도 이제 떠나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래서 조금 더 집세가 싼 곳을 찾아보던 중, 


감람산 동남쪽에 위치한
 웨스트 뱅크 안에 있는 알아자리아라는 곳으로 집을 구하기로 했다. 


또한 이곳은 유대인들에게는 베다니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그곳은 문둥병이 걸린 나사로가 살아서 나왔던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아직은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고, 평화롭다고들 하지만 길에서 쉽게 만나는 총을 들고 다니는 군인들을 볼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웨스트 뱅크 안에 집을 얻기로 했기에 나는 더 긴장이 되었다.


아침이면 항상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남편과 나는 기도를 하였다. 

그날도 남편은 기도를 마치고 옆집의 가게를 가보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면서 급히  옆집의 선물가게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어디를 가도 친구를 잘 사귀는 남편이었기에 그 아저씨와도 가끔 만나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말하고 나는 집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한참을 지나 남편이 뛰어 들어오더니 내게 갑자기 집을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나섰다. 


우리는 택시를 불러 타면서 운전기사에게 주소를 주니 그는 우리를 슬쩍 훑어보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택시가 감람산을 넘자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군인들과 무장 경비들이 나의 시야에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제 우리가 진짜 팔레스타인 영토로 들어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손을 꼭 쥐었다.


"여보 우리가 가는 데가 어딘가요? 감람산을 올라가는 것을 보니 좀 먼데요?"

"아! 여보 신기한 일이 있었어. 

그 선물가게 주인아저씨를 만나러 가서 혹시 웨스트 뱅크 안에 세 놓은 집이 없는지 아는 곳이 있느냐고 하니까, 그분이 깜짝 놀라면서 바로 옆에 있는 친구라고 하고 소개를 해주는 거야!

바로 옆에서 선물을 만지며 서있던 남자분이 그 아저씨 친구셨나 봐. 너무 신기하지 않아?

그분이 주인아저씨에게 자기 집 1층을 세 놓으려고 광고해 달라고 오셨다네.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웨스트 뱅크 알아자리아에 사신대 그래서 지금 우린 거기를 가는 거야" 

"거기가 어디쯤일까요?"

"나도 모르지, 한번 가보자고!"


나는 속으로 많은 분들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그런지 마음이 좀 무거웠다.

'아아! 이산을 넘으면 안 되는데.. 팔레스타인 영역인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넘어버리고 그 안쪽 마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알아자리아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택시가 닭장 같은 작은 가게들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갔다. 

코너를 돌자 넓은 마당과 함께 세련된 3층 집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문 앞에 한 신사분이 미소를 짓고 서 계시며 우리를 맞이하셨는데 그 집주인이셨다. 


집주인 신사분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하며 1층을 소개해 주셨다. 

두 아이를 보시더니, 자신들의 손주, 손녀와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라고 이미 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집이 커서 집세가 너무 비쌀 것 같아 물어보니 집세를 물어보니 1000불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물론 그 당시 유대인지역은 이것 보다 더 비쌌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너무 비싼 재정이라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얼굴을 숙였다.

웃으시며 이말 저말 질문하시면서 우리를 살피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보시더니, 얼마이면 좋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속으로 같이 살기로 한 독일 사역자와 우리 가정이 나눠서 낸다면 600불이면 괜찮은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노 신사 분이 큰소리로 

"600불로 합시다. 나도 더 이상은 안 돼요… "라고 하신다.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분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물으셨다. 


"당신들은 기독교인 것 같은데 우리는 무슬림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저의 가족은 괜찮습니다. 주인 어르신도 괜찮으시지요?" 

"저희도 물론 괜찮지요. 이제 한 건물에 같이 사니 우리 친하게 지내봅시다. 지하에는 둘째 아들 3층에는 큰 아들 그리고 우리는 2층에 살아요 그리고 여기저기 레몬나무도 있고 하니 필요할 때 따서 드세요. 

신선해서 좋습니다. 아래층 마당에서 아이들이 맘껏 놀아도 좋아요 함께 잘 지내봅시다." 




집을 얻기 위해 기도한 지 며칠 만에 정보도 거의 없는 웨스트 뱅크 안에 친절하고 멋진 신사분의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 만나 어색했던 시간은 금방 사라졌고, 그분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가족처럼 우리를 맞아주셨다. 서로의 종교와 문화는 달랐지만, 그 집에서 나눈 따뜻한 마음은 평화 그 자체였다.


넓은 마당에서 매일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놀고 싸우기도 하며 두 아이는 친구들과 잘 지냈다.

어쩌다 동네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과 우리 가족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면 그 신사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이들과 우리 가족을 보호해 주시며 항상 우리 가족의 변호사가 되어 주셨다.

라마단 기간에는 저녁에 음식을 갖고 와서 나눠 주시기도 했고, 나는 부활절날 계란을 삶아 나눠 드리기도 했다. 둘째 며느리가 넷째 아이를 출산하는 날 나는 그녀의 집에 가서 도와주기도 하고 아이들을 돌봐 주기도 하며 그 집의 큰 언니노릇을 하기도 했다. 


평화협정을 맺은 나라였지만 아직도 온 나라가 종교와 인종 때문에 싸우고 있는 환경 속에서 외국인이었던 우리 가족은,  

그 위험하다는 그 웨스트뱅크에서
넓은 관용과 친절한 신사를 만나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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