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과 현지인의 공존!
아들 이 뛰어 들어오면서 고함을 지른다.
"엄마 우리가 드디어 현지인 이 된 거예요 엄마 아셨어요?
"오늘 길을 가는데 외국인들이 지나가는 거예요. 친구들이 그 사람들을 계속 쳐다보는 거예요.
왠지 그 모습이 예전의 나 같아서 마음이 아펐어요.
그래서 내가 달려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인사를 하고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어보니 길을 찾고 있었어요.
그분이 찾는 쇼핑몰을 알려 드렸는데 그 외국인이 너무 감사해하더라고요."
열심히 설명하는 아들은 이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이집트에서 내 모습이 떠올랐어요. 어딜 가든지 사람들이 따라오고 "알로 알로" 하면서 내게 말을 붙이고 따라다니고 약 올리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난 얼마나 수치스럽고 화가 났는지 몰라요.
아마 그들은 날 도와주려고 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너무 자주 그러니까 싫었어요. 그럴 때마다 난 내가 현지인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요."
어느새 나보다 한배나 더 큰 아들이 내 품에 안긴다.
'그랬구나! 그렇게 현지인이 되고 싶었구나!
엄마가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아들의 깊은 갈등을 잘 몰랐구나! 미안하다 아들아!'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아들은 17세 청소년이 될 때까지 선교지에서 이방인으로 자랐다.
아시아의 나라에 살 때는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특히 중동에서 살 때는 더 아들 안에 남자로서 부담도 많았을 것이다. 아빠가 출장을 가게 되면 아들은 엄마와 누나가 집을 나갈 때마다 함께 가야 했다. 여자 혼자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나라에 살 때는 더욱더 남자인 아들은 아빠 대신 많은 것을 해야 했다.
때때로 학교를 오가다가 현지인 아이들 몇 명이 둘러싸고 책가방을 뒤지고 함부로 하는 행동 속에서 이방인으로 현지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었다.
학교를 마치고 얼굴이 얼룩져서 들어오는 아들을 보면서 나 또한 마음이 너무 힘들었었다.
그래서 '이 나쁜 것들.. 엄마가 혼내줄까?'라고 엄포라도 치면 아들은 눈물을 훔치고는 씩 웃는다.
"엄마 괜찮아 그래도 있지 그 애들이 내가 키가 커서 그런지 연필만 가져가더라.
그래서 다 가지고 가라고 했어."
아들이 그 시간에 얼마나 두려웠고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보호해 주지 못한 엄마로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아들과 나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서러운 기억들이 하나하나 쌓였다.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보니 부모가 선교사였고, 그 땅이 고향이라 생각하고 모든 상황에 어울려 보려고 애를 쓰지만 현지인 안에서는 영원히 이방인이었다. 또 여러 나라 사람이 어울려 지내는 국제 공동체에서도 활발하게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이집트가 한국과 축구 시합을 이집트 카이로에서 하였다.
몇 명 안 되는 한국 사람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한국이 이기라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였다.
마침 우리 한국이 이집트를 이겼다. 우린 태극기를 들고 나일강에 배를 띄우고 많은 한국분들이 모여 축하파티를 했었다. 한 시간 동안 배안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피자를 먹으며 얼마나 웃고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가는 날이면 공항에 내리자마자 요구르트 한 줄씩 사서 시원하게 마시고 일정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대형마트를 가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소시지도 여러 가지 많고, 다양한 라면 과 맛난 과일들 모든 것이 신기한 두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좋아했었다.
한국은 영원한 우리의 고향이었고
언제나 그리운 나라였다.
내 나라이기에 비자기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언어를 못 알아들을까 봐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길을 걸어도 이제는 우리를 특별히 쳐다보지 않는다
우리가 바로 현지인이니까!
소속감은 우리네 인간의 깊은 소망이고 그것으로 인해 존중과 정체성이 생겨난다.
긴 시간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던 이방인이었던 우리 가정에는 소속에 대한 불안정이 깊이 자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가 현지인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한참이나 심장을 둘러싸고 있던 긴장감이 "팍" 하고 터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되면서 진정으로 평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에서 살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아들은 비로소 본인이 현지인이 된 것을 발견하고 기뻐한 날!
우리 가족의 저녁 식사 시간은 감동의 이야기로 아주 늦은 밤까지 이어졌었다.
아직도 여러 나라를 다니며 공항에서 긴 환승시간을 여유 있게 누리고 있는 중년을 훨씬 넘은 엄마는 지난 시절 한때는 이방인이었고 또 현지인이었던 모든 정서들을 그녀 안에 녹이고, 오히려 다양한 시간들을 주름진 얼굴에 다 안고 여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