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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Dec 31. 2020

매화의 영광

영매상 소감



                                                   

치열한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들어가서 받은 첫 성적표엔 42등의 석차가 적혀있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내겐 큰 충격이었다. 엄마도 마찬 가지였는지 망연자실. 모녀는 부뚜막에 앉아 기막혀 울었다. 심기일전하여 머리 싸매고 공부해 보았으나 다음 학기도 그 이상 올라가질 못했다. 강남 강북이 있기도 전이니, 연희동 변두리 아이와 도심 아이들의 차이였는지 아니면 전국에서 몰려든 비슷한 아이들끼리의 경쟁이어서였는지 성적 올리기는 참 어려웠다.



나의 모교'경기’는 내겐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내 힘에 부치는 거대한 벽 같았다. 교복을 입고 길에 나서면'경기 학생’이라고 모두들 칭찬하였지만 내 마음속엔 남모를 열등감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6년 동안 성적은 그저 그 타령으로 뒤에서 세면 더 빨랐다.


독일어 이 과반이었던 나는 내 주변 친구들이 의대 치대로 약대로 진학할 때 가까스로 가정대학에 입학하였다. 내 길은 천재소녀들과 달랐다. 그랬던 내가 졸업하고 34년이 지난 모교의 10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영매(英梅)상’을 받았다. 경기 졸업생 중 학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이 되었다며, 교화인 매화가 새겨진 주먹 덩이 만한 금도금 모표에 표창장을 받았다. 내가 좋아서 한, 글쓰기와 책 출간을 모교에서 축하해 준다니 감사한 한편 민망했다. 평생 간판이 되어 나를 도와준 모교를 내가 표창해야 될 입장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란 걸 증명받은 순간이었다. 보잘것없는 나 같은 이를 명예로운 졸업생에 끼워준 걸 보면 경기여고가 대단한 학교임엔 틀림이 없다.


후배인 이숙영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양희은 선배의 미니 리사이틀에 한참 선배이신 이순자 여사와 각 분야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모신 동문의 밤이었다. 내 마음속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모교가 비로소 따스함으로 마음속에 와 닿았던 날이었다. 우리끼리의 말로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매상이 좋긴 좋은가보다. 오랫동안 맺혔던 맘이 풀렸다.


이유가 있는 여행이어서 떳떳하게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간 김에 아픈 노모를 뵈었다. 항암주사가 너무 힘이 드셔서 항암제를 대신 드시기로 하였다고 하신다. 오랜만에 뵈니 많이 야위고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병든 엄마. 멀리사는 자식은 자식도 아니다. 더구나 엄마 수발들러 왔다면서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여, 암에 걸린 엄마의 간호를 받는 불상사가 생겼다. 애물단지 자식 때문에 일거리가 생긴 엄마는 나를 돌보기 바쁘셨다. 나 때문에 자신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며 웃던 엄마는 아파서 공항엔 따라 나오지 못하셨다. 아파트 현관에서 이별할 땐 엄마와 나, 옛날 부뚜막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듯이 울었다.


남동생은 얼마 전 끝난 드라마'일지매’의 미술감독이었다. 매화가 새겨진 영매상을 내가 받고 나니, 올해 우리 가족에겐 매화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누워있던 봄이 벌떡 일어난다는 매화의 꽃말처럼 아픈 엄마도 어서 일어나 생기를 찾으셨으면 한다.




경기여고 동창회보/2009년/62회 임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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