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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Jul 09. 2020

그늘 밑에서

시를 읽다


100도 넘는 더위가 기승인 날. 찬물 샤워를 하고 베란다의 파라솔 밑에 앉습니다. 캘리포니아는 땡볕을 피해 그늘 밑에 들어가면 그래도 바람이 시원합니다. 뒷마당에서 레몬을 따고 텃밭의 민트 몇 잎을 섞어 모히토(Mojito) 한잔 만들어 헤밍웨이의 여유를 흉내 내어 봅니다.

그늘 밑에서

박철 (1960-) 시인의 시
'사랑은 큰일이 아닐 겁니다'를 읽습니다.

사랑은 큰일이 아닐 겁니다
사랑은 작은 일입니다

7월의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한낮의 더위를 피해 바람을 불어주는 일
자동차 클랙슨 소리에 잠을 깬 이에게
맑은 물 한잔 건네는 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손등을 한번 만져보는 일

여름이 되어도 우리는
지난봄, 여름, 가을, 겨울
작은 일에 가슴 조여 기뻐했듯이
작은사랑을 나눕니다

큰 사랑은 모릅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라는
지구에서 큰 사랑은
필요치 않습니다

해지는 저녁 들판을 걸으며
어깨에 어깨를 걸어 보면
그게 저 바다에 흘러넘치는
수평선이 됩니다

7월의 이여름 날
우리들의 사랑은
그렇게 작고, 끝없는
잊혀지지 않는 힘입니다

얼마나 소박하고 청량한 시인지 마음에도 한줄기 바람이 시원하게 스칩니다. 욕심이 포화상태인 세속에서 살다 보니 많이 지치고 마음도 덩달아 황폐해진 터에 이런 글을 만나니 행복합니다. 이런 게 바로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철 시인의 '사랑'에 '문학'을 대입해 봅니다.

'문학'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겁니다. 누군가는 피를 토하듯 절규하고 심장을 쥐어짜고 머리가 쪼개지듯 고뇌하며 글을 쓴다던데, 그런 말을 들으면 무섭기도 하고 그렇게 써 본 적 없는 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저 편하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 제 글쓰기의 모토인데 말이지요. 나이 들수록 글은 쉽고 편하고 눈앞에 장면이 펼쳐지듯 써야 한다는 생각이 더합니다.

글공부를 시작한 이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지식을 펼치면서 어렵게 어렵게 씁니다. 대부분 문인의 초기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모두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박완서, 최인호, 장영희 선생의 글들을 읽으면 참 쉽게 잘 읽힙니다. 오랜 수련을 거친 내공이 있는 쉬운 글들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등단작이나 초기의 시는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풀꽃'같은 세 줄의 시로 독자를 매료시킵니다. 오랜 세월의 습작 끝에 생긴 실력이 명편을 만든 것입니다.

글에 최선을 다했기에 모든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말했습니다. 그의 자신감이 치열함에서 나왔구나 생각했지요. 하루키는 '시간에 의해 쟁취해 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란 믿음으로 30년 넘는 시간을 버텼다고 합니다.

문학이라는 답 없는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간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문학의 언저리 행사에 시간낭비 말고 글과 싸우는 시간이 길어져야 진짜 문학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히 나 따위가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작고 끝없는 힘으로 잊혀지지 않는 문학을 함께 이루어 가기를 요청해 봅니다.

수필가 이정아
한국문인협회 미주지 회보/2018 여름호 권두언


#박철시인#사랑은 큰일이 아닐 겁니다#작고 끝없는 힘#진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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