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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Sep 29. 2020

친정집

추석 풍경




"여보게, 키 큰 자네가 저 위를 좀 닦게"
몇 달 묵은 환기팬 위의 기름때를 보며 엄마가 사위에게 지시하신다. 미국에서 추석 쇠러 온 남편이 열심히 찬장 위와 레인지후드를 닦는다. 동생 가족들이 오기 전 사전 청소인 셈이다.

다리가 불편하고 키가 날로 쪼그라드는 86세 친정엄마는 귀도 잘 안 들리신다. 엄마보다 앞서 불량품이 되어버린 불효 딸년처럼 엄마도 불량품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침 8시부터 세 남동생 가족들이 왁자지껄 들어온다. 일꾼으로 장정 두 아들과 입장한 큰 동생 가족. 갖은 청소용품에 고무장갑을 가지고 일복 차림의 막내 동생네가 도착한다. 녹두전 생선전에 온갖 식재료를 아이스박스 여러 개로 공수하는 둘째 동생 가족이 당도했다.

자손들을 보며 어느새 기운을 얻은 어머니는 사령관처럼 호령을 하며 지휘하신다. 귀가 안 들리시니 더 쩌렁쩌렁하다. 장정 조카들은 무거운 걸 나르고, 막냇동생 가족은 부엌과 화장실을 대청소하기 시작한다. 올케들과 60 가까운 세 남동생들은 모두 앞치마를 장착하고 용역회사 직원들처럼 일사불란하다. 장녀이자 외동딸인 나는 예나 지금이나 자의 반 타의 반 공주처럼 앉아있다. 민망하나 좋은 팔자라 생각하기로 했다.

방마다 3조로 나누어 녹두지짐과 전을 부치기 시작한다. 손자 손녀까지 합세하여 대회하듯 치열하다. 나는 식탁에 앉아 동태와 대구살에 소금, 후추 간을 했을 뿐이다. 12시에 전 부치기가 끝나자 이웃집으로 경비실로 손녀딸들은 배달을 하고 뒷정리 후 추도식을 한다.

사진 속 아버지는 항상 젊으시다. 어머니가 미리 인쇄해 놓은, 그러니까 해마다 똑같은 순서지이다. 다만 대표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도 내용은 세월 따라 달라진다. 이번엔 11월 결혼을 앞둔 조카와 내년에 날 잡은 우리 아이와 청년실업자인 한 조카와 연애가 깨진 조카까지 기도에 포함되었다. 새가정엔 축복을 청년백수에겐 직장을 깨진 연애엔 더 좋은 상대를 달라고 하신다. 너무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기도에 실눈 뜨고 서로 웃었다. 엄마 모르게.

모든 가족 구성원을 놓고 일일이 기도하면, 엄마의 예고대로 25분 걸린다던 기도가 모두 끝나고 주기도문 외움으로 추도식을 마쳤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하나님께 아뢰는 보고서이자 넋두리인 셈이다. 그런데 그 긴 기도 중에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둘째 올케에 대한 기도가 빠져서 하하 웃었다.

간소하게 한다며 나물도 생략하고, 오이무침과 열심히 부친 이북식 녹두전에 생선전, 엘에이에서 온 우리 내외를 생각해 엘에이 갈비, 사위가 좋아하는 돼지 수육이 식탁에 올랐다.

동생들끼리 준비해온 과일상자 등을 서로 나누고 엄마께는 금일봉을 드린다. 엄마는 후반기 생일 맞은 자손들의 생일 축하금을 준비했다 나누어 주셨다. 오고 가는 현금봉투로 추석날이 저문다.

*2018 한국에서 지낸 친정집의 추석 풍경이다.


2020 올해는 팬데믹으로 음식도 준비하지 않고 모이지도 않는단다. 동생들이 가족단위로 따로 엄마를 방문하고 아버지 성묘도 각자 했다고 한다. 우울한 팬데믹 시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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