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어 홀로 유학 오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없으리란 예상은 이미 했다. 그런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학교 교실 안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는 영국인 아저씨 단 한 명뿐이었다. 통통 튀는 목소리를 가진 금발의 영국인 친구는 스물두 살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학원에 왔다고? 요즘은 워낙 취업이 안되니 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경우도 허다하단다. 주변에 그 나이 또래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나를 바라봤다. 교수님? 내가 볼 땐 언니보다 어린것 같아. 수업을 같이 듣던 S가 속삭였다.
학교와 기숙사에 만나 함께 이사를 나온 넷 중에 내가 나이가 가장 많은 것도 이쯤 되면 이상하지 않다. 플랫 메이트였던 Y, C, B와 나는 열 살 이상 차이가 난다. 첫 몇 달은 사이좋게 슈퍼마켓도 같이 가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품목은 1파운드 마저 1/4로 계산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더 내도 아무 상관없었지만(물론 그건 나머지 셋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행동이 꼰대처럼 보일 것 같아 자주 나 스스로를 멈췄다. 하지만 S와 단둘이 있을 때면 내가 굳이 계산하려들었다. S는 극구 사양했다. 런던에 오래 있고 싶을수록 초반에 많이 아껴야 한다면서.
S는 런던으로 유학 오기 전 옥스퍼드에서 어학연수 경험이 있는 영국 생활 선배이기도 했다. 나에게 맥주 한 잔 얻어 마시려 하지 않는 S에게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지만 예상보다 영국 체류가 길어지면서는 자주 S가 한 말이 떠올랐다. 호의보다 자존심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유학생활이었다. S의 나이는 Y, C, B와 나의 중간 정도에,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한 셋과 달리 한국에서 사회생활 경험도 있었다. 내가 Z세대인인 Y, C, B사이에서 정서적 혼돈이 올 때마다 S에게 심적으로 의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공동생활을 결심한 이상 갈등 없이 지내보려는 마음은 밀레니얼 세대의 막차인 나나, Z세대인 셋이나 같았을 것이다. 다만 습관과 본성은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라 긴장감이 풀어지자 각자 집에서 했을 행동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티셔츠 한 장도 다림질하는 엄마와 달리, 빨래를 널어둔 건조대에서 바로 집어 입는 편인 나는 밥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해야 했다. 주방으로 빈 그릇을 옮기는 그 짧은 순간에도 수번의 번뇌를 거듭하며 설거지에 집착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셋에게 ‘잔소리'하기 싫으니 행동으로 먼저 보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을 의식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꼰대 인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싶은 날엔 하릴없이 외로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동안 유튜브만 응시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B가 그러자 C도 그랬다. 어느 날은 C에게 넌지시 물었다. 위로 누나 셋을 둔 눈치 빠른 C는 재깍 사과부터 하면서 나와 가까워졌다고 느끼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라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C가 종종 친구를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을 때 마주 앉아 각자의 핸드폰으로 유튜브 보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으니까. 아니 그럼, 식당의 큰 테이블에 생판 남과 합석해 밥 먹는 것과 다른 게 뭔데?
아무리 내 입장에서 애썼다고 한들, 불쾌해하는 티가 났을 것이다. 같이 밥 먹는 순간이 급속도로 불편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밥 먹는 속도는 더 빨라졌는데, 시간은 더 더디게 흘렀고, 공기는 더 차가웠다. 얼마 후 앨레펀트앤캐슬에 있는 한 마켓에서 나와 B는 폭발하고 말았다. B는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마켓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걸으면서 한 번도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마켓에서 음식이 나온 후에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있는 대로 기분이 상한 나는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나와 B는 거의 4개월을 인사만 하고 지냈다. B가 주방에 있을 때 나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건 B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평생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그 말을 S에게 해버렸다.
“요즘 애들 왜 그러니?”
아무리 마음이 잘 맞는 외국인 친구를 만나도 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으면 결코 모를 정서까지 공유하기는 어렵다. 한국인 또래 친구를 만나면 여기서 학창 시절부터 자란 이인지, 아닌지에 따라 또 달라진다. 결이 같아 통하는 점이 많은 한국인 또래 친구를 어렵게 만나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서로를 향해 던져진다. 비자는 언제까지인지, 그럼 여기 계속 살고 싶은지. 해외에서는 항상 어느 정도 이별을 염두에 두고 만난다.
영국에 오래 체류하고 싶다면 결혼을 하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란 말을 히드로에 내린 첫날부터 들어왔다. 그때는 사람들이 참 무례하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지금은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점보다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운 어느 날 손을 잡아 줄 파트너이자 가장 친한 친구를 만든다는 점에서. 그런 이가 선사하는 정서적 안정감은 얼마를 이곳에 살든 모든 순간을 있는 힘껏 충만하게 지지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