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해산물 시장 탐험기
이리저리 한 덩이씩 나눠 주고도 냉동실을 테트리스 기법으로 꽉 채운 양고기를 굽고, 조리고, 끓이고, 튀겨 가며 다 먹기까지 거의 두 달이 걸렸다. 바비큐의 단점 중 하나는 뒤처리다. 기름이 엉겨 붙은 그릴과 통, 각종 소스로 얼룩진 바닥 청소, 주방의 식기란 식기는 다 내놓은 듯한 설거지 산을 처리하는 일은 셋이 나눠해도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양고기 파티 이후 슈퍼에서 파는, 구우면 맛있을법한 모든 식재료에 대한 실험을 마친 우리의 열정은 급격히 식어갔고 바비큐 통은 농한기에 접어든 농기계의 모습 그것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나는 커버를 씌우지 않았다. 아직 그를 보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덮쳤기에. 슈퍼마켓에서 새우를 보니 왕새우 소금구이가 스쳤다.
“그럼 새우랑 생선 사갈까?”
“노노. 마켓에 가야지"
런던의 슈퍼마켓에서는 고기에 비해 생선을 구하기가 어렵다. 웨이트 로스나 세인즈버리의 큰 지점에 가면 고기와 생선을 다루는 Fresh 코너가 있기도 하고 로컬의 생선가게인 피시 몽거*Monger에서도 그날 들여온 각종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지만, 이런 식료품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동네에 살아야 가능한 일이다. 런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생선 중 하나인 농어 Sea Bass 구이를 해 먹기 위해 버스를 타고 주변의 큰 슈퍼마켓이나 피시 몽제를 일부러 가는 일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편도 버스비만 1.65파운드. 한화로 2600원인데, 왕복이면 5200원. 그 수고로움과 교통비를 감내하면서까지 반드시 생선을 먹어야 하는 날은 거의 없다. 또 하나. 슈퍼마켓의 생선 냉장고에 가면 연어, 농어, 도미 Sea Bream 외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술안주로 고등어구이를 즐기고 제주도에 가면 무조건 고등어회를 먹는 나에게 프레시 코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생선이 고등어라는 사실은 반갑지만,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한국 마트에서 냉동 포장된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먹고 나서야 ‘그래 이 맛이지’ 했던 나였다. 늘 ‘그 맛'이 문제다.
영국에서 가장 큰 수산시장으로 손꼽히는 빌링스게이트 마켓*Billingsgate Market은 도매 시장다운 규모와 영업시간을 자랑한다. 새벽 4시에 오픈, 아침 8시 30분 클로징.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7시 30분쯤 도착하게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은 이미 물 좋은 해산물은 다 빠진 도매 시장의 클로징 장면만 실컷 구경하다가 3kg짜리 냉동새우 한 팩만 들고 돌아오는 참사를 일으킬 뿐이다. 아침잠 많은 우리 셋이 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 15분 무렵. 그때 입장 줄은 이미 시장 앞 대형 주차장을 두 겹으로 휘감고 있었다. 샤넬 오픈 런의 대표적 풍경쯤으로 여겼던 그 장면, 나와는 영원히 상관없을 것 같은 그 장면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생선 런이라니.
줄만 두 시간을 서서 겨우 들어간 시장 안 해산물의 종류를 보고 나서야 나는 흡족했다. 랍스터, 각종 새우, 홍합 및 어패류, 오징어는 물론 한국의 수산시장에서는 보지 못한 유럽 각지에서 온 신선한 생선이 가득했다. 가격도 만족스러웠다. 성인 남성 종아리 두께만 한 농어가 크기별로 세 마리당 10파운드부터 20파운드대까지 다양했다. 풍성한 해산물 바비큐 파티가 그제야 머릿속에 그려졌다.
친구들이 다시 모였고, 우리는 모두 손에 베인 해산물 비린내가 몇 번을 씻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기꺼이 새우를 까고, 오징어를 자르고, 농어를 손질했다. 이미 양 한 마리를 발골한 경험이 있는 K와 B에게 농어 손질은 별일도 아닌 듯했다. K가 흥분해서 말했다.
“이 모든 걸 시내 레스토랑에서 먹는다고 상상해봐! 가격이 얼마겠어?”
인당 예산 최소 100파운드는 잡아야 할 거다. 그러나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맛보겠다고 새벽 3시에 매번 일어나 1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가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대인 둘과 다르게 그렇게 새벽 시장에 다녀온 날이면 나는 하루를 쉬어야 체력이 회복됐다. 그다음에는 둘만 시장에 보내며 나는 너네가 길어온 보물을 손질하는 역할을 맡겠노라 공표했다. 마지막 해산물 파티는 조촐하게 장어구이를 해 먹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주방 싱크대에서 탈출하고자 무던히 애를 쓰던 장어를 K는 잘도 제압했고 장어의 신선도나 맛도 좋았지만 나는 자꾸 한국의 장어구이집에서 모두 편안하게 둘러앉아 직원분이 구워주신 장어를 집어 먹던 순간이 떠올랐다. 인당 100파운드에는 재료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뿐 아니라, 타인의 노동력, 뒤처리 등 모든 게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빌링스게이트 마켓 Billingsgate Market; 영국 내륙에 있는 가장 큰 수산시장. ‘내륙 Inland’을 강조한 이유는 섬나라답게 항구도 많고 그 항구를 중심으로 한 여러 수산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기대하고 가면 안 된다. 그보다 규모도 훨씬 작고, 초장집이나 식당 같은 소매 고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없다. 간단한 스낵과 음료를 파는 카페 정도가 있을 뿐. 매년 평균 2만 5천 톤의 생선이 판매되며 그중 40%가 해외에서 수입된 어류. 약 40개의 점포가 운영되고 있는데(www.cityoflondon.gov.uk) 의사나 약사처럼 흰색 가운을 입고 정신없는 도매 시장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상인들을 지켜보는 일도 꽤 흥미롭다.
*몽거 Monger; 치즈, 고기, 생선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가게를 일컫는다. 부처 Butcher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도 많은데, 이는 고기에만 해당할 뿐 치즈와 생선 가게는 몽거만 붙여 쓴다. 특히 치즈 몽제는 부촌이나 크리에이터 밀집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와인을 곁들여 팔기도 한다. 피시 몽거, 미트 몽거는 좀 더 흔하게 볼 수 있는데 가격이 슈퍼마켓에 비해 저렴하지는 않지만 신선한 제품, 다양한 부위를 살 수 있다. 부촌에 있는 몽제일수록 ‘프리미엄 식품점'으로 브랜딩 되어 있어 각 몽거의 식품 디스플레이 방식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