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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의 조앤 Oct 30. 2022

런던에 차려진 장례식장 상차림

이른 아침 가을비가 내리는 날 빅토리아역 앞에서 고종 사촌동생을 기다렸다. 마지막이 3년 전이었던가. 어려도 속 깊고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아이라, 같이 있을 때뿐 아니라 며칠이 지나도록 좋은 기운을 남기는, 나에겐 행복 보험 같은 귀한 존재다. 아침잠을 기꺼이 이겨 내게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한껏 최선을 다해 밥을 차렸다. 에든버러에서 혼자 공부하는 몇 달 동안 한식이 그리웠단 동생은 서투른 내 솜씨를 무안할 정도로 호사스러운 칭찬으로 받아 주었다. 된장국, 삼겹살 구이, 콜라찜닭, 국적 불문의 반찬, 떡볶이까지. 동생이 그리웠던 것은 밥만이 아니었다. 친구 사귀기가 에세이 쓰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다. 말할 사람이 없어 매일 토론토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고 했다. 그건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될까 싶은 연약한 마음을 런던에 와서는 용감하게 엄마에게 드러낸다. 서울에 가면 나는 다시 든든한 장녀가 될 테니까 지금은 모든 부담을 내려놓은 안식년이라고, 괜찮다고 합리화를 하면서.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메뉴 설명은 생략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런던에 오면 되도록 왕립 식물원인 큐 가든 Kew Gardens에 간다. 세 시간을 열심히 걸어야 겨우 다 돌아볼 수 있는 숲 같은 곳. 몇 번을 갔어도 매번 새로운 꽃이 피어있고, 분수는 매번 다른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그런 장면을 같이 둘러보면서 걸으면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도 두 톤 정도 높여 웃게 되는 신기한 곳. 

수상한 시간에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의 부모님은 깊이 잠들었을 시간, 런던의 오후 4시. 친할아버지의 부고였다. 전화를 끊기 전부터 눈물을 쏟아내는 동생 앞에서 나는 빠르게 다시 집안의 첫 손주로 돌아갔다. 내가 지금 막 받은 공이 무슨 색인 지도 모르는데, 동생이 들고 있는 공부터 감별해주는. 서울에서야 어떻게든 빨리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면 그만인데, 여기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곧 가야 할 애프터눈 티 예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항공 예약 앱과 애프터눈 티 예약 페이지를 아무 진전 없이 몇 번을 오갔다. 


스콘 맛집 뉴언스 Newens, The Original Maids of Honour











하기로 한 일, 해야 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해가 짧아질대로 짧아진 11월 오후, 우리는 차분하게 애프터눈 티를 먹었다. 이 와중에도 클로티드 크림은 맛있다며 동생이 울상인지 뭔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서울이라면, 누구에게 이 부고를 알렸을까 생각하다 S와 Y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 보냈어도 됐다. 그저 해외에서 부고를 겪어 본 적이 없으니, 서울에서처럼, 관성대로 행동하는 것이 껍데기나마 나를 지탱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현관문을 열자 고소한 전 냄새가 코에 닿았다. Y가 차려둔 장례식장 식사 상차림. 갑작스럽게 할 수 있는 음식이 별로 없었다며 Y는 부산하게 주방과 거실을 오갔다. 육개장 대신 빨간 고추장찌개, 호박전, 스팸전, 부추전, 두부김치에 흰 밥까지. 새하얀 A4용지 9장을 이어 붙여 식탁 위에 깔고 나니 나는 정말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소주 반 병을 Y, 사촌동생, 나 셋이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Y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했는지,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냐며 허허 웃은 게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Y가 준비한 장례식장 상차림











해외 생활이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가족에 대한 개념을 뒤흔드는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애초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는 주의로 살아온 나의 첫 일 년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도 나의 부재를 ‘잠시 자리비움' 정도로 간주했다. 두 해, 세 해가 지나면 상황이 조금씩 바뀐다. 원가족은 여전히 나를 있는 힘껏 지지해주지만 지금 코 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거나 공감해 줄 수는 없다. 통신사에서 제멋대로 부과한 요금을, 방금 버스에서 당한 인종차별을, 불합리한 집주인의 횡포를. 그러면 조금씩 나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유사 가족이 된다. 같은 시간대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간과했던 부분 중에 하나였다. 내가 전화하면 언제든 받아 줄 이들이지만, 있는 대로 속이 상해 혼자 길을 걸을 때 시계 앱에 들어가 서울 시간을 보고 난 후엔 핸드폰을 가방에 쓱 밀어 넣는다.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가족들도 나와 같은 감정,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 땐 더 서글퍼진다. 


한 지붕 네 방에 살았던 나, Y, C, B는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어떤 우당탕탕이 있었든 간에, 2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준 다정함이 마음 한편에 뭉근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엔 그 친구들이 나의 가족이었다. 신경전을 벌여도 내일이면 간식을 빌미로 화해를 건네고, 신나는 일이 있으면 주체 못 하고 쏟아내 버리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같이 화를 내주는. 지금 당신의 가족은 누구인가요?





좌측부터 B, Y, C,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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