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하숙생 일기 2
마리아, 할머니가 호더인 것은 확실하나, 주방 물건에 대해서만큼은 사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직업이 셰프이기 때문이다. 런던 서북부의 대형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할머니는 한국으로 치자면 병원 영양사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런던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그때 조리사를 시작했다. 포르투갈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단다(내 취향과 달라서 그렇지 할머니는 나름 집 꾸미기에도 본인만의 주관과 콘셉트가 명확했다). 조리 관련 자격증만 열댓 개가 넘고, 거실 책장은 지난 수십 년간 영국에서 시대별로 유명했던 셰프들의 책으로 빼곡할 정도. 병원에서는 주로 환자들의 식단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데, 적을 때는 열명분, 많을 때는 서른 명분의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개그맨은 집에서 과묵하고, 셰프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할머니는 병원 밖을 나오면 주방에 서 있는 것조차 꺼려하는 쪽이었다. 본인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은 싫어했지만 냉장고와 냉동고, 주방 칸칸마다 식재료는 항상 꽉 차 있었다. 다음 날 병원에 가져가려고, 친구를 위한 요리를 하려고, 마침 저렴하길래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는데, 집안에 있는 코리안 베이비가 굶게 해서는 안된다는 책임감도 이유 중 하나였다.
소문난 요리왕이었던 나의 외할머니는 손도 컸다. 주말마다 자식과 손주들을 불러 한 상 푸짐하게 차리고 거의 20개의 입에 자신의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을 그렇게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평생 공무원으로 일한 친할머니는 요리에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제크라는 크래커를 좋아한다, 함흥냉면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우리 집은 제크가 떨어질 날이 없었고, 명절에 온 집안 식구들 외식은 영등포에 있는 함흥냉면 집이었다. 두 분은 내가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 일 년 차이를 두고 돌아가셨다. 마리아는 손수 요리를 하는 대신, 제크와 함흥냉면 대신, 주변 식당의 각종 아시안 푸드를 사다 주었다. 본인은 입이 짧아서 1인분을 거의 삼일에 걸쳐 먹는 한이 있어도, 1인분을 같이 나눠 먹자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꼭 2인분을 사거나, 본인이 생각 없는 날에는 내 식사만 사다 냉장고에 넣어 뒀다. 내가 그 집의 세입자로 돈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초기에는 그런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입자의 매 끼니를 신경 쓰고 챙기려는 노력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냉장고 안, 아니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묻지 말고 다 먹으렴”
내가 그 집 냉장고에서 발견한 놀라운 세계는 할머니 단골 델리에서 판다는 로즈메리를 끼운 올리브, 포르투갈식 베이커리인 노팅힐의 리스보아 파티세리 Lisboa Patisserie에서 판다는 식사용 빵과 상온에서 녹여 그 빵을 찍어먹는 치즈, 리들 Lidl에서 파는 저렴하고 맛 좋은 포르투갈 와인이었다. 할머니는 매일 밤 자기 전 레드 와인을 한두 잔씩 마셨기 때문에 주방에 레드 와인이 마를 날이 없었다. 주식은 봉지라면도, 큰 사발도, 블랙 신라면도 아닌 오리지널 신라면 작은 컵. 첫 번째 코리안 베이비가 건넸던 신라면과 사랑에 빠진 할머니는 시행착오를 거쳐 본인의 입맛과 위장 크기에 딱 맞는 신라면 작은 컵에 안착했다. 다만 할머니의 건강이 걱정됐다. 라면이 얼마나 중독성 있는 음식인지 내가 아주 잘 안다, 하지만 자주 먹으면 할머니의 건강에 분명 좋지 않을 것이다, 기왕 먹을 거면 봉지라면을 끓여 드시라.
“고마워. 근데 먹고 싶은 건 먹고살래. 내가 사는데 무슨 낙이 있다고.”
엄살 부리시긴. 할머니는 소소한 취미나 이벤트를 포켓몬 볼 수집하듯 모아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또 어찌나 많은지, 매일 밤 고민 중 하나가 내일 혼자 있고 싶은데 그 약속 어떻게 취소해야 하는가였을 정도다.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할머니의 취미는 비둘기 밥 주기였다. 남은 빵 부스러기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비둘기용 모이를 사다가 놀이터에서 뿌렸다. 할머니… 비둘기는 하늘을 나는 쥐인데 심지어 모이를 돈 주고 사서까지?
“그래? 근데 난 내 친구들한테 밥 주는 게 좋아."
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영화 <나 홀로 집에>에 나오는 비둘기 아줌마의 현실판이었다.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와인, 라면, 비둘기…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남한테 베푸는 일에만 익숙하지, 좀체 받는 것에는 서투른 할머니는 뭘 부탁하는 일도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자주 가는 슈퍼에 신라면 작은 컵 재고가 떨어진 것이다. 그때 마침 유럽에서 식품제조법과 관련해 심사 문제로 한국 라면 수입이 잠시 중단되어 한국인 커뮤니티에서도 사재기를 하네 마네 하는 글이 올라오던 참이었다. 핀즈버리파크역 근처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잠깐 들른 코너 숍에서 신라면을 발견했을 땐 참으로 기꺼웠다. 큰 컵, 작은 컵 포함 12개를 (싹 쓸어 담아) 할머니에게 안겼다. 효도를 한 기분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나라에 한 번 가봤다. 리스본에서 타투를 하고, 도루 강으로 와인 투어를 가고, 카스 카이드의 갤러리를 탐험하고, 포르투에서 에어비앤비 미식 투어까지 즐긴 아름답고 알차고 따뜻한 열흘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코리안 베이비들을 아끼면서 아직 한 번도 한국에 가보지 못했다. 천식이 있어 비행기를 오래 탈 수 없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가지 않는 이상, 천식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며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포르투갈은 얼마든 갈 수 있지만,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는 보고 싶은 얼굴이 거의 매일 있는데 그들은 12시간 거리에 있고(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런던-서울 비행시간은 15시간이 됐다), 할머니는 고향이 2시간 거리에 있지만 그곳에 있는 아무도 그립지 않다.
“영국에 계속 살고 싶어? 여자가 살기에 나쁘지 않은 나라야. 개인을 존중한다는 게 뭔지 아는 나라지. 하지만 영원히 이방인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을 거야. 네가 그것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고."
내가 그 집을 떠나기 두 달 전쯤엔 할머니가 많이 아팠다.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며칠 입원까지 했다. 병문안을 가겠다는 나에게 여기 일하는 사람이 죄다 내 친구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고양이 밥이나 잘 챙겨주라며 껄껄 웃던 할머니가 집에 돌아온 날 나를 보더니
“포르투갈 생각이 많이 나더라"
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어르신들이 내가 빨리 죽어야 지하는 말만큼, 고향에 갈 마음이 없다는 말도 곧이 듣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