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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의 조앤 Oct 30. 2022

제 시간에 오지 않는 기차

운전을 좋아하면서도 차 없이 3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기차 덕분이다. 촘촘하게 뻗은 영국의 철길은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나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 준다. 하우저 앤 워스 Hauser & Wirth 소머셋 Somerset 갤러리에 갈 수 있는 브루톤 Bruton역이라든가, 요크셔 조각 공원이 있는 웨이크필드 Wakefield역이라든가. 철길 위를 부드럽게 달리는 기차는 쭉쭉 내달리며 런던 시내에서는 맛보지 못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스위스나 미국처럼 대자연을 볼 일은 스코틀랜드 끝자락까지 가기 전에는 없지만 소박하게 솟은 구릉지대, 드문 드문 보이는 양과 소, 중세 시대부터 있었을 법한 작고 오래된 교회가 차례로 나를 스쳐가면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진다. 


강한 바람에 가로로 누워버린 영국의 수풀더미를 멀리서 보면 말차빙수가 떠오른다. 런던 - 콘웰 구간 풍강



런던 외곽의 서레이 Surrey로 이사 오면서는 기차를 더 자주 탄다. 지하철도, 우버도, 버스도 없는 타운에서 뚜벅이가 어디를 가자면 오로지 기차뿐. 주로 이용하는 것은 남서부를 연결하는 사우스 웨스턴 철도 South Western Railway로, 런던의 워털루역에서 시작한다. 열차 내 안내 방송은 여행의 수단이 아닌, 통근을 위해 기차를 타면서 발견한 또 다른 묘미다. 이 기차가 지나가는 트랙과 그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생방송 라디오 같다. 프로페셔널한 DJ가 아닌 사근한 동네 반장님이 마이크를 잡은 느낌이 조금 다를뿐. 보통은 이런 식이다. 


여러분, 워털루 도착 예정 시간이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어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기찻길이 미끄러운 관계로 여러 기차가 지연됐어요. 저는 8번 코치에 있어요. 가끔 정차 중에는 플랫폼에 나와 있기도 하고요. 지금은 워털루로 들어가는 신호를 기다려야 해서 잠시 멈췄습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 오! 우리 이제 가네요.


이런 날도 있었다. 런던이 유례없는 열대야로 몸살을 앓던 여름이었다. 예상대로 많은 기차가 취소되거나, 연착됐다. 25개의 플랫폼이 있는 워털루역은 안내방송에 따라 이리저리 기차를 옮겨 다니는 승객들로 혼란 그 자체였다. 보통 우리 집에 닿는 기차는 워털루역에서 새벽 1시가 막차인데, 걱정이 되어 밤 10시에 서둘러 도착했음에도 기차에 앉아 2시간 반을 보내야 했다. 


밤 10시
여러분, 출발이 지연돼서 미안합니다. 지금 날씨 때문에 서비턴Surbiton역 전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요. 신호를 받아야 우리가 떠날 수 있는데, 그걸 기다리는 중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금방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불편을 끼쳐 정말 미안합니다. 


기장은 30분 간격으로 같은 안내 방송을 했다. 


밤 11시 50분
여러분, 솔직하게 말할게요. 기차가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솔직하게(Honestly)라는 단어가 귀에 꽂힌다. 기차 안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이러느니 호텔에서 자겠다고 떠나는 이도 있었고 택시를 부르자며 사람들을 모으는 이도 있다. 불행히도 우리 집 방향은 아무도 외쳐주지 않아 나는 그저 가방을 끌어안은 채 기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린다. 


새벽 12시 10분
여러분, 기쁜 소식이에요. 기차가 곧 출발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20분 뒤 기차의 문이 닫히고 시동이 켜졌다. 


새벽 12시 36분
여러분, 오늘 날씨 때문에 기차가 지연되고, 취소돼서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할게요. 이 기차는 서비턴 역을 거치지 않고 다른 루트로 돌아 첫 번째 정차역에 지금부터 1시간 30분 후에 도착합니다. 저는 12번 코치에서 열차를 운전하고 있고요. 여러분이 지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화가 났는지 저는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12번 코치로 오지는 마세요. 문 안 열어 드릴 겁니다. 대신 제가 에어컨 빵빵하게 켜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합니다. 우리 모두 집으로 곧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웃는다. 박수를 치는 이도 있다. 적어도 기장은 이들이 12번 코치로 몰려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약속도 지켰다. 나는 곧 냉장고 가장 밑 칸에 들어앉은 피망 같은 상태가 된다. 주섬주섬 두꺼운 후디를 꺼내 입는 10대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다시 한번 몸으로 교훈을 깨우친다. 영국에서는 한여름에도 사계절을 대비할 것. 

이 분은 트레인 가드



















기차에서 안내방송을 하는 사람은 기장에 해당하는 ‘트레인 컨덕터 Train Conductor’, 열차를 돌아다니며 안전 문제를 돌보거나 표 검사를 하는 사람은 ‘트레인 가드 Train Guard’다. 트레인 컨덕터는 자신이 어느 코치에 있는지 고지해야 한다. 승객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의논해야 하면 바로 그를 찾아가 대화할 수 있도록. 실제로 친구 중 하나는 자신이 탄 열차가 워털루로 직행한다는 걸 뒤는 게 알고 컨덕터가 있는 코치를 찾아가 중간에 내려야 하는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열차는 오직 그 친구를 위해 중간 간이역에 멈춰 주었다. 열차에 따라 퍼스트 클래스에만 전기 소켓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마침 배터리 용량이 얼마 없어서 애가 타던 중 내 표를 검사하던 트레인 가드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텅텅 빈 퍼스트 클래스에 1시간 머물러도 좋다며 허락해 주었다.(퍼스트 클래스에 무단으로 앉을 경우 벌금을 문다) 배터리 용량의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인류애도 함께 솟았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동남부의 캔터베리 Canterbury로 향하는 기차는 사슴 때문에 정차한다는 방송이 빈번하단다. 


여러분, 갑자기 정차해서 미안합니다. 지금 사슴이 트랙을 건너가고 있거든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친구가 처음 방송을 들었을 때는 그 사슴을 보려고 창 밖을 두리번거렸지만, 몇 번 더 동일한 구간을 이용한 후, 꼭 사슴 탓이 아니라 정차를 위한 핑계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단다. 그래도 기왕 기다려야 하는 거, 신호가 아니라 사슴 때문이라 생각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친구가 덧붙인다. 백번 낫지. 나는 동의의 웃음을 보낸다.



  




기차 간식으로 제격인 맥머핀. 어차피 맛은 다 비슷한데도 메뉴판 앞에서 항상 처음인양 고민한다. 계란과 치즈냐, 베이컨이냐, 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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