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의 조앤 Oct 30. 2022

브리스톨에서 배달된 양 한 마리

2020년 3월 11일, 세계 보건기구(WHO)에서 팬데믹을 선언하기 전까지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친구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우리가 꿈꿔왔던 유학생활을 충실하게 즐기고 있었다. 일주일에 2-3일 정도 학교에 가고, 끝나면 동기들과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거나 문화생활을 하러 나가고, 틈틈이 여행을 다니며 유럽을 만끽했다. 플랫 메이트 중에 중국인이었으니 연말부터 그들의 고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나 또한 이미 1월 말부터 한국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있었다. 3월 20일에는 영국의 모든 펍, 레스토랑, 카페를 비롯해 체육문화 시설이 문을 닫았다. 주변 친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 집도 넷 중에 둘이 귀국 결심을 굳혔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던 카페였는데















내가 런던에 남은 것은 철저히 내 선택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해외 유학이었다. 학교는 인터내셔널 스튜던트들은 되도록 집으로 돌아가길 권유한다는 메일까지 보내왔다. 처음 그 메일을 받았을 때는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었다. 조금의 오기도 생겼다. ‘영국 정부도, 학교도, 누구도 너를 책임질 수 없다’는 공공연한 메시지 따위에 휘말려 내 오랜 꿈을 접고 집에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떠나더라도 내 의지로 떠나겠다는. 


Y와 C가 고향으로 떠난 자리에 K가 들어왔다. 평소 깐깐하게 굴던 집주인은(런던의 집주인들은 악명을 인지하고 있다면) K의 여권도 보지 않고 넘어가 줬다. 런던은 워낙 외국인 학생, 직장인의 비율이 높은 도시인 데다, 팬데믹 선언 이후 집 계약 기간과 상관없이 살던 방을 (거의 버리고) 돌아간 이들이 많은 탓에 집주인들도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마음은 결의로 가득 차 있어도 여전히 배는 고팠다. 마음껏 우울하려면 일단 먹어야 한다. 치킨을 구워볼까, 파스타를 양껏 만들어 볼까. 불가항력적인 일 앞에서는 지금 나의 정신을 지킬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이 그 시절 내가 배운 교훈이었다.  


유럽피언 K가 들어오면서 주방에서 볼 수 있는 식재료의 풍경도 달라졌다. 내가 쌀과 라면을 쌓아두는 반면 K는 파스타면을, 멸치 대신 각종 스톡을, 고춧가루 대신 피리피리 Peri-peri를 뿌렸다.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메뉴를 해 먹는 일이 오늘의 가장 큰 이벤트였던 어느 날, 바비큐 통을 사면 좋겠다 싶었다. 2평 남짓한 뒷마당을 드디어 제대로 써보겠구나. 사흘 뒤 배달된 검은 색 바비큐 통. 그것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조립하고 차콜과 소시지, 삼겹살 등을 사 오던 친구들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여기 브리스톨에 있는 양 농장인데, 도축해서 직접 집으로 가져다준대.”


하루는 K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열 댓마리의 양들이 푸른 언덕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K와 B는 고기라면 종류를 마다하지 않고 좋아하는 데다, 양 한 마리를 배송까지 130파운드에 살 수 있고 바비큐 장비까지 갖췄으니 완벽하다며 신이 났다. 며칠 후 정말, 진짜로, 말 그대로 양 한 마리가 배달됐다. 다만 놓친 것이 있었으니, 발골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 ‘그러니 저 가격이 가능했겠지’라고 생각하며 덩그러니 누워 있는 양을 막막하게 바라보던 나와 달리 둘은 유튜브에서 하우 투 발골 콘텐츠를 보며 이미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 후, 양 한 마리는 지금 당장 부처(한국의 정육점)에서 팔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질서 정연하고 깔끔하게 부위 별로 발골이 되어 있었다. 


적나라한 양고기 사진 대신 다른 날의 바비큐 현장



















화제의 양고기를 맛보기 위해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외식을 못한지도 두 달이 넘어가는 시점이었으니 이 뒷마당 바비큐 초대장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한 친구는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왔다. 차콜에 불이 지펴지고 집안은 앰프에서 나오는 비트로 울려댔다. K와 B는 각종 양 부위에 레몬즙, 파프리카 파우더, 큐민(쯔란), 난도스*Nandos의 단계별 소스를 뿌리거나 발라 구워 날랐다. B는 친구들에게 고기를 나눠주며 이건 허벅지와 갈비가 연결되는 부분이고, 여긴 목 부위이며, 오! 이 부분을 자를 땐 거의 손을 벨 뻔했다는 발골 전문가 저리 가라 싶은 언변을 쏟아 냈다. 아, 혹시 오해(열정에 찬 20대 남자 둘을 차콜 앞에서 혹사시키고 편하게 고기만 받아먹는 30대가 당신 아니냐는)가 있을까 말하자면 나는 그 파티에서 ‘호스트가 바비큐 파티에서 그릴 외에 챙겨야 하는 모든 것'을 담당(해야)했다. 그래도 매일 크고 작은 상실감을 견뎌야 했던 시기에 모처럼 반가운 얼굴들로 집이 가득 찬 느낌이 썩 좋았다. 





*난도스 Nandos;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포르투갈식 그릴 치킨을 판매하는 프랜차이즈다. 런던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런던 맛집'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영국에 살다가 귀국한 친구들이 그리운 것 중 하나로 난도스를 종종 꼽을 정도. 이쯤 되면 치킨의 민족 한국인에게도 인정받았다 할 만하다. 난도스의 7 가지 맛 소스는 슈퍼마켓에서도 판매해 치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집마다 하나 둘쯤 구비해두고 먹는다. 


이전 03화 주방에 홀로 외로운 30대 꼰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