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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의 조앤 Oct 30. 2022

서른다섯, 겁도 없이 시작한 런던 유학기


히드로 공항에 내려 우버를 타고 앞으로 두 달간 머무를 캠버웰 Camberwell의 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출장으로 왔을 때의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더 짙게 다가왔다.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 왔기 때문이겠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택시 기사님의 목소리가 차 안에 공허하게 맴돌았다. 혼자 있고 싶어요 기사님.


몸과 마음이 함께 덜컹이던 히드로 착륙 순간 



















‘8시간 이상 장거리 비행을 마친 후에는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는 내 여행 수칙 중 하나. 우버 안에서 기숙사 근처의 실패 확률 적어 보이는(구글 평점 4.5 내외) 펍을 찾아냈다. 적당히 북적이는 홀, 알맞은 온도의 음식과 맥주, 친절한 웃음. 그날 이후 캠버웰 암스 The Camberwell Arms는 타지 친구를 접대해야 할 때, 조금은 특별하게 기분을 내고 싶은 날 찾는 나의 단골집 중 한 곳이 됐다. 


오리 백숙 같은 콩피 오리 다리 Confit Duck Leg  



















배를 채웠으니 냉장고를 채울 차례. 나에게는 런던 유학 동안 진행할 비밀 프로젝트가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럽 식재료 충분히 경험해보기'였다.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첫 단계라니, 퐁퐁 솟아나는 도파민을 만끽하며 슈퍼마켓을 검색했다. 레스토랑 바로 근처에 *오프라이센스 Off-license가 있었지만 첫 장을 보는 날이니만큼 제대로 된 슈퍼마켓을 찾고 싶었다. 기숙사에서 바로 앞에 있는 세인즈버리 로컬 Sainsbury’s Local은 대형 슈퍼마켓 체인 중 하나인 세인즈버리의 소규모 버전으로, 한국으로 치자면 이마트 에브리데이인 셈인데, 유사품으로는 웨이트로즈 Waitrose의 리틀 웨이트로즈 Little Waitrose가 있다. 


여름이라 체리가 한창이었다. 그래, 난 이제 체리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여러 크기의 체리 팩을 둘러보다 난 이제 여기 살 사람이니까, 원하는 언제는 체리를 챙겨 공원도 가고, 길에서도 먹고… 하는 주책을 떨며 작은 팩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그 작은 슈퍼마켓에서 자그마치 두 시간 동안 쇼핑을 했다. 프라이팬에 탈탈 부어 볶기만 하면 되는 야채 모둠을 보면서는 야끼소바 만들 생각에 들떴고,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되는 반조리된 드럼스틱(닭다리)을 발견하고는 당분간 한국식 치킨은 안녕이라고 설레발을 쳤다. 대망의 요거트 섹션. 내가 친구들에게 유럽의 온갖 유가공 식품은 다 먹어보고 오겠노라 선언했을 때, 그들은 웃었지만 나는 참말로 진심이었다. 나의 내면은 기쁨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안타깝게도 그날 첫 집밥은 무산됐다. 체리, 야채 모둠, 드럼스틱, 요거트 6종, 식빵, 치즈, 햄, 맥주까지 다부지게 사서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서울에서 가져온 커트러리 외에 아무런 조리기구도, 그릇도, 소금, 후추, 올리브유 같은 가장 기본적인 조미료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결국 다시 슈퍼마켓에 다녀오긴 했다. 그릇보다 더 중요한 물을 사러. 


몇 년 전부터는 기록해 두지 않으면 자주 잊는다. 지명은 말할 것도 없고 물을 사러 나갔다가 물만 빼고 다 사 온다거나. 리마인드 메시지나 이메일은 더 이상 귀찮지 않다. 덕분에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어. 대학원 에세이를 쓸 때는 자주 울상이 됐다. 영어는 둘째 치고, 집중력이 말도 못 하게 떨어진 나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동갑내기 친구들의 단톡방을 자주 찾는다. 나만 그런 거 아니지? 대학 졸업 한지 거의 10년 만에 공부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니, 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하는 다정한 말을 건네준다. 괜찮아지긴 했다. 집중력이 낭비해도 좋을 만큼 넘쳐나던 스무 살 시절로 회복됐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상태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그래도 쓰고 싶은 글을 쓰는 날엔 몇 시간도 잘 앉아 있다. 왜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지 알아간다. 






*오프라이센스 Off-license: 코너 숍이라고도 불리며 주류 판매가 가능한 생필품 가게. 한국으로 치자면, 소규모의 동네 슈퍼를 생각하면 되는데, 영국에서는 테스코, 세인즈버리, 웨이트로즈, 코업 Co-op 등 큰 체인을 슈퍼마켓, 그 외를 오프라이센스 또는 코너 숍이라 부른다. 밤 10시 전에 문을 닫는 슈퍼마켓과 다르게 새벽 늦게까지 영업한다는 특징도 있다. 


오프라이센스 맥주 냉장고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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