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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중독입니다

네 번째. 시작, 그리고 멈춤

by yErA

내 귓가엔 정신없이 날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누가 들을까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민망할 정도로 공기 중으로 빨리 확산되는 호흡 딸린 내 목소리가 이미 통제 불가능한 내 심장 상태를 여과 없이 전달하고 있었다. 시쳇말로 현타가 왔다.


사회생활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 지금에 비하면 훨씬 낮은 문턱이었겠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는 높디높다는 취업의 벽을 어찌어찌 넘었다. 이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음 전개 상황을 예상할 수 있으리라.


나를 향해 '앗싸'를 외치던 그 쾌감은 빠르게 사라졌다. 나를 향한 주위의 '엄지 척' 반응에 우쭐했던 기분은 쉽게 공중분해됐다. 다시 빨리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한층 긴장감 넘치는 새로운 경주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훨씬 치열하고 세련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전에 정교하게 다듬었던 전략은 사회생활 초반부에 그럭저럭 먹혀들었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보수적 색채가 강했던 조직이었던 터라 나만의 고유 색깔을 애써 찾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잘 감추는 자가 더 인정받는 조직 문화였다. 애매한 중간톤 무채색 계열의 조직 색깔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추면 됐다. 특히나 다행인 점은 괜찮은 성적 또는 성과를 통해 평범함을 감추는 전략이 먹혔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성실함이라는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늘 갈구하는 인정이라는 보답은 조금씩 뒤따랐고 이와 함께 나의 애씀은 계속됐다. 본격적인 에너지 누수가 진행되고 있는지 조차 모른 채 말이다.


나를 창조한 신은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외부 요인으로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계속해서 가속 페달을 밟을 나를 말이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분명 이전에도 그는 내게 많은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보지 못하고 지나치고, 봤더라도 눈과 귀를 막고 못 본 척하고,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조르는 나의 어처구니없는 바람들을 들으면서 그는 결단한 듯하다. 브레이크를 걸기로 말이다.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포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업무가 주어졌다. 애초에 간절하게 바랬던 자리는 아니었지만, 척하고 시늉하기에 딱 좋은 자리라 나쁠 건 전혀 없었다. 그게 신이 내린 특단의 조치 인지도 모른 채 나는 한동안 우쭐함에 들떴다. 곧 날개 없이 추락할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가장 자신 있는 게 뭐죠?”, “음... 공부입니다."

가장 평범한 질문에 대해 최악의 대답을 했다. 부서 안에서 학벌로 순위를 매긴다면 나는 뒤 쪽에서 세는 편이 훨씬 더 빨랐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껏 내가 뱉은 말 중 가장 주워 담고 싶은 말 중 하나다. 그리고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말이다. 분명 한심함을 한 스푼 얹은 표정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금융시장에서 주식, 채권, 외환 등 자금을 운용하는 업무는 남자 직원들만이 맡는 금녀의 영역이었다. 이 부서에서 내디딘 첫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 않았지만 하여튼 나는 자금을 운용하는 부서에서 채권딜러를 했다. 그리고 외환딜러도 했다. 결국 남들에게 내밀기 딱 좋은 명함을 가지게 됐다. "와! 여자 딜러라고요?"라는 주위 반응에 어깨에 힘이 제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을.

하지만 몸을 옷에 맞추기 위해서 숨을 참기로 했다. 조금 지나서는 고강도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비대한 몸을 난해한 옷에 맞추기 위해서. 그러면서 늘 그랬듯이 주문을 외웠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지만 이번엔 인내와 성실을 무기로 한 전략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앞에 놓인 장애물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경주마들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그리고 여유를 부리며 달렸지만, 나는 아무리 발을 굴리고 도약하려 해도 장애물을 넘을 재주가 없었다. 매번 다시 출발선에 돌아가 있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음의 생채기는 계속 깊어갔고, 자존감은 바닥을 알 수 없이 추락했다. 무능한 나 때문에 자금운용 업무가 여자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내려질 것만 같아 죄책감도 끝없이 몰려왔다.


아직 그때 그 긴장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회사의 운명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에 관한 발표였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부서 업무와 관련된 평이한 내용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였다. 충분한 시간이 미리 주어졌고, 외운 대로만 하면 되는 그런 거였다. 난이도로 따지면 ‘하’.


하지만 그간의 부진을 한 번에 뒤집으려는 과욕과 맞물린 표현할 수 없는 중압감이 내 목소리와 호흡을 흩트려놨고, 잘해 봤자 냉정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앞서 집어먹은 두려움이 내 심장을 미쳐 날뛰게 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달달 떨리는 손, 억지로 끊어 읽기 연습을 하는 것 마냥 뚝뚝 끊어지는 문장, 가쁜 호흡과 산만하기 그지없는 시선.


‘와... 이럴 수도 있구나!’ 이 상황에 제일 적응이 안 되는 건 나였다. 그 순간에 깨달았다. 이 옷을 더 입고 있으면 숨을 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럴듯한 비상구를 찾는데 온 힘을 쏟았다.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강제적으로 아웃되는 길만은 피하고 싶었다.


신은 그간 열심히 애써 살아온 내가 딱했는지 퇴로를 만들어주셨다. 잠시 '멈춤'을 허락하셨다. 그러면서 값진 선물을 안겨주셨다. 미련하게도 그게 선물이라는 것을 한참 지나 깨달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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