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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번째. 파리 마법사
낯선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해서 위축될 것도 없다. 난 벌써 여기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생존을 위한 언어는 이미 습득한 터라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어릴 적 외국어를 배울 때의 기민함과 순발력은 떨어졌다 해도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언어를 알아가는 기쁨을 느끼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는 터라 쌓여가는 언어의 깊이는 훨씬 깊을 테다.
여기는 프랑스 파리.
한 달 살기라는 질문에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렸던 도시, 파리. 한 달 살기로 시작된 나의 파리 생활은 어느덧 1년이 조금 넘었다.
서울과 비교하면 나의 작업실을 품은 생활공간은 크게 줄었지만, 파스텔 톤 계열의 벽지가 포근함을 품고 그 안에서 각자 자기 이름표를 달고 있는 아기자기한 반려식물들이 좁아진 공간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창문을 향해 놓인 투박한 나무 책상 위에는 간결하게 책들이 정리되어있고, 연필들은 가지런히 놓여있다. 건너편 민트색 탁자 위에는 크고 작은 액자들이 엇갈리게 놓여있다. 지나간 과거는 모두 찬란하다고 했던가. 행복의 단편만 쏙쏙 골라놓은 사진들이 알록달록한 액자 안에서 그리움을 내뿜고 있다.
애초에 신랑은 프랑스에서의 한 달 살기를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언어도 언어지만 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허황된 환상을 품은 속물이 되고 싶지 않다 했다. 그랬던 사람이 어느덧 공간 한편을 본인 음악 취향을 가득 담아내고, 좋아하는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전혀 겁이 없다는 것을 프랑스어 배우기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어느덧 프랑스인 친구도 여럿 뒀다. 와인이라는 공통점을 찾았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생테밀리옹 와이너리 여행 일정을 짜느라 바쁘다. 와인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것 자체가 속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롤랑가로스 프랑스 테니스 오픈 일정을 챙기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어느덧 그는 너무 분주하다. 파리라는 낯선 공간과 시간을 얄미울 정도로 잘 즐기고 있다.
나는 프랑스 한 달 살이를 하면서 미술관에 박혀 살았다. 내가 프랑스를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하루 종일 미술관에 박혀 거장의 작품을 마주하면서 과거의 무게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인간의 물질적인 본능과 욕심이 가장 응축된 금융시장과 관련된 일을 오래 하면서 바짝 메마른 나의 정신세계에 기름칠이 필요했다. 현재의 건조하고 탐욕스러운 냄새보다는 과거의 고급스러운 향기를 맡고 싶었다. 아름답던, 추악하던 인간의 본질을 담아낸 거장들의 작품을 통한 위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이 치열하게 전하려 하는 풍부한 스토리를 읽어내고 싶었다. 작품 어딘가에 꼭꼭 숨겨뒀을 것 같은 그 스토리를 샅샅이 찾아내 한껏 공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나의 인생 톱니바퀴를 조금이나마 거꾸로 돌리고 싶었다. 시선이라도 과거로 돌리면 나의 시계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흐를 것만 같았다.
애초에 예상하긴 했지만 파리에서의 한 달 살이의 당초 계획은 당연히 깨졌다. 나는 파리에서 사계절을 모두 경험했다. 나는 이제 유명한 장소만을 찍고 다니는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곳에 삶의 뿌리를 내린 현지인도 아니다. 어중간한 위치에서 조금 익숙해진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때론 느긋하게 때론 빡빡하게 시간의 강약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됐다.
나는 새로운 책을 쓰고 있다.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아 머리가 무겁다.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러한 퍼즐 찾기는 매번 낯설고 곤혹스럽지만 퍼즐을 맞춘 이후의 쾌감을 잊지 못해 굳이 텅 빈 ‘무’의 영역에 다시 발을 디디며 그 무언가와 끊임없이 숨바꼭질을 한다.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미술관에 가서 좋아하는 작품을 보고 또 본다.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나만 알아차릴 수 있는 스토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을 유독 좋아한다. 파리의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감히 거장들의 작품을 두고 호불호를 판단할 만큼 미술적 식견이 높지 않다. 다만 철저하게 대중적인 내 눈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마음이 끌리는 작품이 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 시대가 바라는 기준을 과감하게 떨쳐내고 자신 만의 작품세계를 창조한 작품들을 통해 대담한 용기를 얻고 싶어서다. 순응하지 않고 반항한 거친 삶 가운데에서 완성된 작품 안에서 보다 입체적인 스토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징글징글하지만 국제 금융시장과 경제 관련된 칼럼을 쓰고 번역 작업도 하고 있다. 겨우 말랑말랑하게 만든 내 감성을 메마르게 하는 작업이라며 실컷 칭얼대지만 실력을 뽐내기 위해 역시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쩌면 돈을 좇는 인간들의 모습만큼 다양한 스토리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숨은 고수들의 글을 찾고, 편집하는 작업은 가장 보람 있는 일이다. 정말 다채로운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언어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함께 한다. 그럴 때마다 언어라는 마법의 힘에 흠뻑 매료된다. 그러면서 나는 대단한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생긴다. 나의 기묘한 마법으로 누군가를 울리게 또는 웃게 하고 싶다.
끝도 없다. 안 되겠다. 일단 마무리하려 한다. 나의 행복한 상상 말이다.
너무 들뜬 마음에 하마터면 프랑스 비행기 티켓을 살 뻔했다. 당장 해치워야 할 일들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지만 설레는 마음만은 그대로 남겨두기로 한다. 미래의 구체적인 계획을 글로 꾹꾹 눌러써내며 밖으로 선포한 것만 같아 이상한 책임감도 생겼다.
언젠가 유명한 작가가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이 글을 읽으며 미소 지을 그날이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신통방통한 마법사가 되어있을지 누가 아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