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되감아 기억을 종종 재구성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다행히 '만약에 함정'에 빠지진 않는다.
만약 '그 결정을 했더라면', 또는 '그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하고 아쉬워하거나 자책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꽤 괜찮은 결정을 하고, 또는 최악의 결정을 하지 않은데 대한 안도와 행운에 대한 감사함이 더 크다.
나의 시선이 이처럼 종종 거꾸로 되감기는 데는 올해의 끝이 점점 가까워지는 계절 탓도 있겠지만, 나이를 너무나도 꼬박꼬박 잘 먹은 이유도 있을 테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나의 이야기들을 선택적으로 꺼내보는 회상의 작업들이 가능한 나이가 된 것이다.
이리저리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깔끔하게 한 자리에 모으고, 흐릿한 기억들은 조금 더 선명한 색깔로 덧입히며 혼자 웃고 울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여전히 그럴듯한 미래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현재를 몰아붙이고 있지만, 과거의 기억을 다시 읽고, 다시 보고, 다시 느끼며 거기에 한동안 머무는 게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된 것이다.
꽤나 긴 시간 동안 사회생활을 했으면서도 내가 속한 분야의 일인자가 되어 있기는 커녕 가당치 않게 아직도 갈 길 몰라 방황하는 나를 마주할 때 기억의 되감기는 속도는 한층 빨라진다. 그러면서 기억의 창고에서 그때 그 시절의 나의 행적에 대한 조각들을 찾기에 열을 올린다.
난감하지만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어설픈 욕심을 장착한 내가 뭐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그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에 시선이 꽂힌다.
나의 짝꿍은 아니다. 나의 단짝은 나의 진로를 항상 같이 고민하고 열심히 지원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내게 모성의 시계를 장착한 아들이다.
애초부터 엄마 노릇에 딱히 재능이 없었던 난 모성의 시계가 작동하는 순간부터 내 시계를 잘 쳐다보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나의 큰 도움 없이도 아들의 시계가 잘 작동하는 것을 본 이후부터 난 내 시계를 점검하고 수리하기 시작한 셈이다. 변명일 수도 있지만, 나의 선택적 기억은 그렇다.
앞서도 말했듯이 '만약에 함정'에 빠질 생각은 없다. 오히려 모성의 시계 때문에 난 충분히 차고 넘치는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을 쌓아두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