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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초 Mar 12. 2024

평가'D'를 받으면 생기는 일

다면평가 열람하라는 메일이 날아왔다. 다면평가는 주변 동료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으로 지난해 말에 실시했다. 절대평가라 상대를 깐다고 해서, 내 점수가 올라가는 구조가 아니므로, 다들 s 주고받았겠거니 하고 평가결과를 눌렀다.


"하위(D)"



성추행과 갑질을 일삼는 사람들이 받는다는 그 하위?!?

하위에 해당하면 승진이 어렵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저녁에 누워서도 머릿속은 온통 평가결과 생각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평가자 8명 중에 절반이상은 나를 D로 평가했다는 말인데, 얼핏 떠오르는 인물들은 같은 팀 젊은 여직원 4명이었다. 이 결과를 받고 나니, 내가 받았던 모욕적인 언행과 비웃는 듯한 표정과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이해가 갔다.


'나를 정말 싫어했구나. 나만 몰랐구나. '


 딴엔 친해지려고 아침에 커피도 자리에 올려두고 최대한 공손히 업무에 대해 물어보고 밥도 사주고 했는데. 밥 약속한 날에 갑자기 휴가를 썼던 것도, 더 이상 커피 좀 사주지 말라고 말했던 것도, 나를 싫어해서 했던 행동들인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다. 내가 업무적으로는 미숙해도 인간미는 넘친다고 혼자 착각했다.  



다음날, 다른팀 차장님께 다면평가 결과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뒤통수까지 뻘게질 뻔했다.


"잡초과장은 모르겠지만, 잡초과장이 10년 만에 복직한다고 했을 때, 다들 싫어했어요. 회사에서 주는 휴직 10년 다 쉬고 이제서야 일하러 나왔다고. 앞에선 뭐라고 못했겠지만 뒤에서 욕들 엄청 했어요. 그래서 잡초과장 다면평가 안 좋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요."


다들 s주는 분위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더니,


"그건 예전일이고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요.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요. 세상이 달라졌어요."




그렇구나, 입장바꾸어 놓고 생각해 봐도, 내 옆자리 직원이 10년간 쉬다가 나타나서 일 배우겠다고 설치면 안 예뻐 보일 것 같다. 10년 동안 냉동인간이 되었었다느니, 아이 셋 키우느라 회사에 복직할 생각은 꿈도 못 꿨다느니, 그런 말도 남들에겐 아니꼽게 느껴졌을 것 같았다.


 유연근무, 단축근무, 3년이나 되는 육아휴직 등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회사가 되었다는 회사사람들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회사는 달라진 것 같았지만 그대로였다. 달라진 척을 했던 것뿐이었다. (이러니 출산율이 저조할 수밖에...!!!!!!!!!!!!!!!!라고 외쳐보고 싶지만, 이 또한 왕따의 하소연에 불과하다)




다면평가로 주위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주변 시선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 헛살았구나,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개탄했다.





"언니, 블라인드에도 다면 얘기 많잖아. 못 봤어? 그리고 요즘 누가 다면 's'로 몰아주냐? 그건 내 점수 퍼다가 남들 좋은 꼴 시키는 거야. 언니가 바보짓했네!"


입사동기와 이야기하다가 또 현타가 왔다. 블라인드? 서둘러 설치한 블라인드 앱으로 1개월 전, 2개월 전,... 1년 전, 2년 전, 이야기를 톺아보는데, 아... 왜 진작 이 목소리들을 무시했을까.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너, 너 말이야, 네가 바로 그 꼰대야,  정신 차려


라고 무수히 많은 블라인드 글들이 나를 가리켰는데.



- 휴가 달고 왜 회사에 출근하나요?

- 밥, 커피 그만 사주세요, 같이 밥 먹기가 싫어요,

- 육휴 복직 후 승진 후 또 휴직 복직 승진

- 휴가 가면서 일을 떠넘기고 가는 인간

 - 휴가 가면서 휴가내용은 왜 말하나요?

- 팀식, 회식은 그만했으면 해요

- 일 못하면서 윗사람 눈에만 잘 보여서 승진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

- 집 근처에서 일하면서 유연근무 쓰는 인간들, 6시까지 누구는 근무하고 싶어 근무하나요?




나는 젊은 사람들 눈에 꼰대 중에 꼰대였고 같은 동년배 직원들의 눈에도 아니꼽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이하원 때문에 4시에 급하게 회사를 나서면서도 덜 마친 일에 대해 죄책감과 부채감을 안고 나서곤 했는데, 그건 무능한 거였다.

 단축근무를 썼지만,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회사에 머무는 시간은 9시간가량. 점심시간 때까지 일하는 걸 감안하면 9시간을 일에 매달린 건데도 일을 못 쳐내고 쌓이기만 한 나는, 월급루팡이었다.

 교육받으러 가면서 급한 일을 덜했기에, 발을 동동 굴렀더니, 옆자리 대리가 대신처리해 주겠다고 맡기고 가라고 했기에, 미안하면서도 고맙게 맡기고 갔는데... 그런 것도 맡기면 안 되는 거였다. 자기 일을 떠 넘기는 건 절대 해서는 안될 짓이었고. 급한 일이 있으면 미리 해놨어야 했는데, 소진해야 하는 연차 휴가 달고 회사에 나와 일했던 것도 더더욱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상사의 눈에는 예뻐 보였을지라도 후배들에게는 절대 해서는 안될 꼰대짓이었다.





머리 처박고 입 다물고 일만 해


 예전 팀장의 충고가 오늘따라 귓속에 맴돈다. 틀린 말 하나 없다. 주위 둘러볼 것도 없다. 승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집에서 삐약삐약대는 아이들이 있는데, 하위 평가가 대수랴, 꼰대가 대수랴,


 대가리 처박고 입 닥치고 맡은 일만 하면 되는 거다.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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