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할 수 없는 조직에 대하여
불안돈목(佛眼豚目).
부처의 눈과 돼지의 눈이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추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이 사자성어는 조선 총독부에서 금석문(金石文,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원)을 정리한 조선금석총람에 실린 말로, 무학대사와 조선 태조 이성계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시국이 안정됐을 때 흉허물 없이 지내자며 무학대사에게 돼지를 닮았다고 농을 던졌다. 그러나 무학은 태조에게 부처를 닮았다고 했다. 태조는 불평했다. 흉허물 없이 지내자고 한 자신의 의도를 거절한 셈이니까. 그러자 무학은 '부처님 눈으로 보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돼지로 보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을 칠 말이지만 태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출처 : 제주신문)
오늘 나는 부처의 눈을 가진 부처 같은 상사와 돼지의 눈을 가진 돼지 같은 상사를 보았다.
작년의 나는 어찌 보면 직장 사춘기를 겪는 사람 같았다. 회사를 옮기고 더 큰 세상으로 나와 원하던 활동을 해갔다. 처음에는 좁았던 활동 영역이 넓어져 신난 게 컸다. 그리고 욕심도 많아서 대책 없이 일을 벌인 것도 있었다. 본업 말고도 해야할 게 많이 쌓였지만, 꾹 참고 해 나갔다.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나에게 분명 도움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것들을 하는 내내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으니까. 그래서 성장할 수 없는 조직에 있는 나를 한탄하며 바깥 활동에 더 매진했다.
그 결과물로 올해 초, 책이 나왔다. 혼자 해낸 건 아니었고 여럿이서 모인 결과물이었다. 여럿이었기에 내게 주어진 원고량도 적었고,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타겟한 인쇄일이 있어 인쇄일 몇 주전에는 몇날 며칠 밤 늦게까지 교정을 봤다. 여럿이서 작업한 거라 교정에 게으름을 피울까 하다가도, 책임감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인쇄된 책이 나왔다.
여러 저자들을 소개하는 글 중에 내 소개가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막연히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에 뿌듯했다. 저자 소개글은 각자가 직접 썼는데, 읽을 때마다 벌거벗은 것 같다가도 절로 웃음이 났다. 내 소개글을 쓸 때 회사를 밝힐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회사를 밝히지 않은 저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은 잠시, 그냥 밝혔다. 독자들은 저자들과 공통점을 느낄 때 저자에게 더 호감이 간다. 내가 그랬다. 그냥 과거와 현재의 동료들이 좀 더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회사를 밝혔다.
그리고 난 요즘 현재 회사를 밝힌 걸 후회하고 있다.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이었다. 회사 내부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이 책을 교육 담당자인 동료가 구입했다. 그 동안 교육에 관심을 1도 안주던 한 상사는 책 구입 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동료를 불렀다. 환불 하라고. 내가 저자인 게 이유였다. 회사 교육에 회사 직원인 내 책이 있으면 안된다고 했다. 회사 직원인 나에게 이득이 가면 안된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는데, 동료가 자기한테 보고도 안하고 그냥 구입을 해서였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내가 그 윗 상사한테 보고만 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내가? 윗 상사한테? 왜?
이런 일 칭찬해주는 분위기였으면 어련히 알아서 자랑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과거의 동료들에게는 이미 다 자랑했다. 알아서 홍보도 해주시고. 알아서 내부 교육에 활용해주시고. 그래서 나는 회사 내부 교육에 활용이 안된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 상사는 동료에게 면박을 주더니 내가 기분 나쁠테니 나한테는 말 전하지 말라고 했단다.
내가 기분 나쁠 건 아나보지? 개소리, 아니 돼지 같은 소리도 쉴 틈 없이 하고 있었다.
동료에게서 이 말을 듣고 다짐했다. 만약에 정말 책이 잘 팔려서 2쇄를 찍는다면, 그 때는 현재 회사는 꼭 뺼 거라고. 여기에 있는 거 자체가 창피하니까.
내가 돼지 우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오늘 아침에 돼지 같은 상사가 돼지 같은 소리를 동료에게 해댔다. 지난 주 돼지가 아닌 그 돼지의 윗 돼지다.
보고할 것이 있어 돼지 집무실에 들어간 동료는 책을 챙겨 들어갔다. 보고가 끝나고 책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며 회사 내부 교육에 활용할 것이라고 전달했다. 그러더니 이 돼지가 하는 말,
"근무 시간에 썼대?"
(이 쯤 되면 돼지한테도 좀 미안해지려고 하는데..) 동료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퇴근 후 시간 내서 썼다고 어필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너한텐 가능하지 않겠지. 너는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근무 시간에 일은 안하고 딴 것만 하니까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지난 주말에 많이 내려놓고, 마음을 많이 비워놨다고 하더라도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다. 저 말을 들으니 한순간에 내가 회사가 싫어 발버둥 친 것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몇 날 며칠 교정보던 것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죽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돼지 새끼들때문에 빡쳐있을 때 부처 같은 분이 등장했다. 직전 상사 분이었다.
구글링을 하다가 내가 커뮤니티에 쓴 글을 봤다면서 멋지다는 말을 해오셨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존경하고 있던 분이었는데 괜히 울컥해졌다. 얼마 전에 이 분과 아는 상사분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겸 연락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 분이 내가 책을 쓴 걸 알고 계셨다. 알고 보니 이 분이 알려주신 거였다. 당신이 사무실에 오신 분들에게 직접 책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인재를 육성한 것 같아서 뿌듯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 날 한 시에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반응할 수가 있구나, 싶었다.
불안돈목(佛眼豚目).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추하게 보인다.
난 사람이니 이 돼지들을 사람으로 볼 것이다.
돼지들아, 니네들은 그냥 나를 돼지로 봐. 사람 소리도 내지 말고.
사물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도 있으니 만물을 자기 척도로 보아서는 안된다.
꿀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