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죽음과 자살
죽음을 논할 때 우리는 자주 자살이라는 행위를 같은 범주 안에서 함께 이야기한다. 마치 ‘죽음’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두 개의 현상을 공통분모로 묶어 놓고, 그 층위를 조정함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두 개념이 지니는 행위의 방향성과 그 행위에 이르게 되는 인간의 상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단어의 외형만을 공유하는 방식에 가깝다. 죽음과 자살을 같은 언어로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그 질문을 다루는 인간이 어떤 시간 경험과 의식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의 전제값이 설정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논의는, 결국 두 단어가 지닌 실제 경험적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죽음과 자살을 모두 ‘의지’라는 거대한 형이상학적 범주 안에서 사유한다. 이 접근은 죽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소멸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것을 삶에 대한 태도와 의지의 문제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철학적 성취라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죽음을 관조의 대상으로 전환함으로써, 개체의 소멸과 세계의 지속을 분리해 사유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그러나 한 개체의 자연적 소멸로서의 죽음과, 선택의 형식을 띤 자살을 같은 의지의 언어로 다룰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살은 단순히 의지가 삶을 부정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환원되기에는 그 발생 조건과 내적 구조가 다르다. 쇼펜하우어는 손으로 눈을 가린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비유를 통해, 개체의 선택적 소멸이 궁극적인 의지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못하며, 그저 현상의 단절만을 가져올 뿐이라고 말한다.
이 설명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정합적일지 모르나,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는 이미 자기 삶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관조의 단계에 놓여 있다.
문제는 자살이라는 선택의 국면에 놓인 인간이 그러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자살을 고민하는 주체에게 현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에 대한 공포가 동시에 침투하여 점유한 시간이며, 현재라는 감각 자체가 붕괴된 상태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삶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거나, 한 걸음 물러서 관조하라는 식의 조언은 분석이라기보다 사후적 정리에 가깝다. 그것은 고통이 발생하는 조건을 설명하지 못한 채, 고통이 이미 정리된 이후의 언어를 소급 적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동물의 경우다. 지금까지 보고된 동물의 자살 사례는 극히 드물며, 대부분은 지속적인 환경 붕괴나 인간 개입에 의한 심각한 행동 이상 상태에서 발생한다. 이는 자살이 생명 일반의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의식 조건 아래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임을 시사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바와 같이, 이성적 숙고의 층위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들, 즉 시간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갖지 않는 존재들에게서는 죽음은 존재하되 자살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자살을 단순히 죽음의 한 변형으로 다루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자살을 논하는 출발점은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 경험이 어떻게 붕괴되는가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다. 자살은 죽음을 향한 충동이기 이전에,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압도하면서 더 이상 현재를 견딜 수 없게 되는 심리적·인지적 상태의 문제에 가깝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살을 ‘의지의 긍정과 부정’이라는 형이상학적 언어가 아니라, 불안과 기억, 예측이 현재를 점유하는 구조 속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 이때 자살은 더 이상 죽음의 하위 범주가 아니라, 인간이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무너질 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새롭게 위치 지워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