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방법
우리는 이미 먹고살기 힘든 세상을 벗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의미 있고 풍요로운 삶 혹은 의식주의 해결 이외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 등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살기 위한 본능보다는 본질을 고민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는가. 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진 채 본능적인 동물의 모습보다는 사유하는 인간의 본질에 더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인류는 성숙해 가는데 비해 우리는 개개인이 살아가야 할 목적성을 찾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 앗아가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갈피를 잃어가고 있다. 나를 알아 가고,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뭘까. 언뜻 생각하기에 누구나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나라는 인간은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어린 시절엔 가족을 바라보고 살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아가 주변인들을 바라보고 그 모습들과 그들이 원하는 세상에 익숙해져 가며 살아가게 된다. 어린 시절, 나라는 한 사람으로서 자아가 형성되고 조금 더 나이 들어 사춘기를 넘어갈 즈음 거울을 보던 난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색다른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늘 다른 사람들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게 어색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어색한 채로 거울을 보고 멋을 부리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취향이 생기고 사람들에게 내 생각과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정작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사회적으로,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남들의 취향이 다분히 많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삶은 결국 남들이 잘하는 걸 잘 해내야 했고, 남들이 대체적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해야 정상이며, 사회라는 조직 안에서 비슷한 목표에 대한 성과를 보여주어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교육받으면서 자란다. 우리는 그렇게 초중고를 지나 성인이라는 돛단배 위에 버려지게 된다.
난 고등학교 2학년 때 미술을 하고 싶었다. 난 누구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고, 그림 그릴 때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과 학교에서는 예술가의 삶은 평탄치 않을 것이라며, 대번에 나의 자아가 외치고 있는 나의 작은 꿈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렇게 나는 인문계를 진학하게 되었고, 아무 의미 없이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에 의해 선택된 학과를 진학해 내가 원한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경영학과의 전공서적을 펼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교육 체계와 가정에서 자식에 대한 교육 방식을 생각해 보면, 성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포함되는 그 순간까지 한 인간으로서 그 어떤 선택과 책임에 대한 스스로의 명확한 자아를 확립하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이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나친 학구열에서 오는 부모의 간섭과 보호에서 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처럼 보인다. 그것에 대해 또 한편으로 해석하자면 그들의 지나친 자식에 대한 소유욕에서 오는 부분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과도기에 사시며 느꼈던 그네들의 삶을, 사람이 살아가는 본질보다는 본능에 앞서 있던 그 시절 그분들의 생각과 목표로 -그 시절은 그럴 수 밖이 없었다- 자식들 또한 자신들의 불안감을 떨쳐 낼 수 있는 삶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 말이다. -이것은 세대를 뛰어넘어 다음 세대인 현재 어린이를 키우고 있는 세대들의 자식에게까지 전이되고 있다- 이 것은 사실 사명감 이라기보다는 부모인 본인의 욕심과 불안에 대한 강요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본인의 삶의 질과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오롯이 본인 스스로의 몫이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본인이 져야 비로소 스스로에 대한 독립적인 인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갓난아기 때 요람에서 생활을 한다. 자아가 생기기는커녕 일어나 걷지도 못하는 시절부터 독립적인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자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혼자인 채 자아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무엇을 기억하지도 못하던 그 시절이 인간의 본질을 형성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은 육아 방식부터 전혀 다르다. 아이를 키워본 가정이라면 잘 알겠지만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온 집안이 아이와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부모와 아이는 함께 자고 함께 모든 생활을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인생 전반에 대한 보살핌과 속박 속에서 점차 아이는 인생의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고, 본인의 삶에 대해 인지하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것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삶의 모든 선택과 실수에 대하여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커지는 삶을 살게 된다. 사실 이렇게 자란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가족이라는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형성된 우리의 자아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온 우리는 과연 스스로에 대한 존재감을 어디까지 인지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성인이라는 패러다임 안에서 우리의 미래를 설계할 시간이 과연 찾아올 수는 있는 것일까. 이런 우리가 나를 위해 대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인지하고, 대체 얼마나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사회적으로 혹은 부모님의 취향대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며 나라는 인간을 알지도, 알아야 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라난 우리들이 대체 어떻게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되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며 어떠한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철학은 철학가들이 남겨 놓은 말들을 외우고 이해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그렇게 사유할 수밖에 있었던 방법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는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철학가라는 거창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무릇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사유해 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사유해 내는 방법을 터득해 내는 방법을 20세 이전에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 다시 말해 우리의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기 위한 돛단배 위에 혼자 올라가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 생각해 내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모든 삶의 독립을 태어난 지 40년이 지나서야 해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은 친구와 사회의 애정에 대한 결핍과 보통의 삶이 이루어야 할 숙제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허우적거렸으며, 이것에 대한 결핍과 두려움 속에 벌벌 떨며 하루하루 불안함과 걱정 속에서 살아왔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방법을 몰랐던 난 아주 작은 것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너(나)는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마시며 수다 떠는 시간이 진정으로 행복한가? 너(나)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진심으로 스스로가 좋아하는 취향의 옷인가? 너(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진심으로 행복한 일인가? 너(나)는 연필이 좋은가 볼펜이 좋은가부터 아주 작고 세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 끝에 나는 내 삶에서 불편한 것들을 조금씩 걷어 내어 가는 시간을 성인이라는 패러다임을 갖게 된 지 한참 지나고도 지난 요즈음에서야 갖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고찰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조금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태어난 지 40년이 자난 이제야 비로소 혼자가 편해진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한 존재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그 누구보다도 나라는 사람 스스로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행복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고 내가 선택한 모든 것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비로소 삶의 외로움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