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 (3) 사랑은 사랑으로 남나요

일년 내내 사라지지 않는 작은 입병처럼

by 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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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왜 헤어진 건데?"



맥주잔에 응결된 물방울이 흐르다 멈춘다. 윤영과 이별한 지 1년, 남선은 대학 졸업 후에도 간간이 연락은 했던 동기를 만나 그녀와의 사랑을 풀었다. 이제는 끝나버린 사랑. 끝난 사랑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 해가 지나도록 그의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전할 수 없는 말들을 대신 동기에게 했다. 자신의 바보 같은 연애사를 들려주어 깊게 내려앉은 마음만 해결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이제 와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인생관이 너무 달랐어.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근데 오히려 안 싸우고 그냥 넘기던 문제들이 나중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 같아. 나랑 걔는 정말 많이 대화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전부 다 이상적이고 행복한 미래만 그리고 있었더라. 우리 사이엔 빛만 있다고 생각했어."


"붙잡진 않았어? 그렇게나 사랑했으면, 조금 질척이고 미련 있는 남자가 되더라도 붙잡아 보지 그랬어."


"물론 고민 많이 했지. 직접 만나볼까, 아님 전화를, 편지는 어떨까 … 이런저런 방식 전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심지어 저 중에서 편지가 가장 좋을 것 같아서 길게 썼거든, 아니 전할 마음에 비하면 짧은 건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걔는 절대 마음 안 바꿀 것 같거든. 너무 올곧은 애라서 자기가 신념 있게 결정한 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성격이야. 그래서 그냥 접었어. 그리고 내가 사랑하던 애가 오래 고민해서 내린 결정일 텐데, 그걸 무시하고 붙잡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이 판국에 왜 걔를 생각해. 네 마음이 중요하지. 그 편지 지금이라도 보내는 거 어때. 너 오랜만에 만나서 누구랑 연애하고 헤어졌다는 것도 잘 몰랐는데, 지금 너 되게 불안정해 보여. 내가 봤을 때 지금 당장이라도 걔 붙잡고 싶어 보여. 일년이나 지났는데도."



후회로 점철된 남선의 사랑, 시간이 지난 사랑에 약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는 그녀와의 추억 속에 갇혔다. 그가 시간을 닫아버린 건지, 사랑이 닫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생각해서 붙잡지 못했다는 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붙잡고 또 붙잡는 과정이 결국, 그들의 사랑을 왜곡할까 두려웠다. 그냥 마침표에 순응하고 아파하는 게 사랑을 사랑으로 온전하게 남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헤어지고 나서 여행도 쏘다니고 밀린 책도 읽고 열심히 운동도 해봤는데, 전혀 나아지는 게 없었어. 그냥 잠깐 잊는 정도지. 보통 연인과 헤어지게 되면 확 힘들잖아. 밥도 입에 안 들어가, 의욕도 없어, 하루 종일 눈물만 흘리다가 잠에 드는 뭐 그런 거. 근데 난 이상하게 안 그래. 잔잔하게 마음이 아려. 뭐랄까, 입병이 아주 작게 난 듯한 느낌. 근데 그게 1년 내내 전혀 사라지지가 않네. 그냥 남들처럼 번쩍 아팠다가 회복하면 좋으련만."


"다른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뭐. 내가 어디서 읽었는데 말이야.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마지막 사랑으로만 잊힌대. 너무 그 애한테 매몰되지 말고, 다른 사랑 찾아봐."



하지만 남선은 사랑을 지워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오랜 시간을 괴로워한 건, 결국 그의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만나 쉽게 윤영과의 순간을 잊는 걸 그는 마음속 깊이 거부했다. 그는 그녀와의 장면을 계속 곱씹었다. 엔딩 크레딧까지 전부 보고도 일어나지 못하는 영화 관객처럼, 언제까지고 앉아 있을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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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헤어지고 시간은 무참히 흘러, 벌써 한 해가 기울었네요. 제가 경어체를 쓰는 이유는 역시, 이젠 당신과 저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헤어진 연인은 가끔 보는 친구보다도 못한 관계이니까요.


이 편지는 결국 당신에게 전할 순 없습니다. 전할 순 없다고 마음먹었는데도, 쓰는 데 꽤나 애를 먹었네요. 몇 번이나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면서도, 제 마음을 온전히 담지는 못했습니다. 길게 쓰는 데도 이 모양 이 꼴이라면, 저는 시인이 될 재능이 없는 걸지도요.


당신과의 인연이 끝나버렸습니다. 제가 부족한 탓인지, 아님 원래부터 이럴 운명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왜 매미만 우는소리를 따서 이름을 지었냐고 묻는 당신이 참 좋았습니다. 왜 좋냐고 물으셔도 정확히 대답할 순 없어요. 사랑이 하는 일이 원래 그런걸요.


아주아주 긴 대하소설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그만큼 길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질리도록 사랑했다면 후회가 없을까요? 아뇨. 그래도 후회하겠네요. 질릴 수도 없고요.


저는 유한한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이 영원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 방법은 간단해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자신을 각인하는 것.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제 마음에 당신을 묻어 놓을게요. 제 유일한 바람은 단 하나, 당신의 마음에도 똑같이 저를 묻어 주세요. 그럼 끝나버린 우리의 인연을, 결국 사랑이라 칭할 수 있겠죠.


끝나버린 사랑도 사랑이라고 불러줘요. 설령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묻어놓은 마음을 굳이 캐내진 말아주세요. 그저 조용하게 당신의 마음에 살고 싶어요.


끝으로, 행복하세요. 언제나.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