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모든 것』 - 백수린 / 상실에도 아랑곳없이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

by 조창
봄밤의 모든 것, 2025년 2월




그녀는 식탁에 앉아 앵무새,라고 써봤다. 앵무새가 갔다,라고 쓰려다 가버렸다,라고 썼다. (35쪽)





1.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 들어보셨나요? 논어 12권 10장에 나오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한다'라는 말입니다. 사랑 없는 사람에게 삶이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랑과 사람, 그리고 삶 이 세 단어가 동일 어원에서 파생되어 갈라졌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의 어원은 나머지 둘과 다르게 한자어로 '생각 사(思), 헤아릴 량(量)'에서 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긴 하지만요. 최근 여행에서 만난 사람에게 세 단어의 어원에 대해 이야기해 줬는데, 본인은 그래도 '삶, 사랑, 사람'이 하나의 줄기에서 가지 쳐 나왔다고 믿고 싶더랍니다. 저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백수린의 《봄밤의 모든 것》 은 상실과 허무에 허우적거리는 인물들의 내면을 핍진하게 그린 소설집입니다. 총 7편의 단편 중 첫 네 편-'아주 환한 날들', '빛이 다가올 때', '봄밤의 우리', '흰 눈과 개'-은 별개의 이야기를 담았고, 마지막 세 편-'호우',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은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 회원으로 연을 맺은 세 인물이 각각 등장하는 연작소설입니다.


저는 소설집의 첫 이야기 '아주 환한 날들'을 읽고 서두에서 말한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이 떠올랐습니다.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배웠던 것인지 대학 전공 시간에 들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의미만큼은 잘 기억하고 있네요. '아주 환한 날들'은 남편의 죽음 이후 건조한 삶을 살아가던 칠십 대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적적하고 단조로운 그녀의 일과는 '앵무새' 한 마리와 교감하며 따뜻하게 변화합니다. '그 시절,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앵무새가 전부'였던 것입니다. 앵무새와 함께하던 짧은 시간, 그녀의 날들은 '아주 환한 날들'이 되었습니다. 어째서 고작 앵무새 한 마리가 그녀를 살게끔 했을까요?




2. '아주 환한 날들'


그녀가 평생교육원에 신설된 수필 쓰기 수업을 수강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다만 글쓰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는데요. 그녀는 '수필 쓰기 수업이 수요일 오후 3시에 개설되지만 않았더라면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시간대에 여섯 달 전에는 '건강 수지침' 수업을, 1년 전에는 '여행 영어 회화' 수업, 그보다 더 전에는 '생활 인터넷‘ 수업을 들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홀로 지켜오던 과일 가게를 체력이 부쳐 아예 접은 이후 그녀는 자신의 일과를 아주 정교하게 짜놨을 뿐입니다.


매일 정해진 일정을 기계적으로 소화하는 그녀는 얼마간의 자부심을 느낍니다. '변기가 막히면 배관공을 부르고', '바퀴가 나오면 슬리퍼로 죽이고', '직접 구입한 실내용 사다리를 타고' 직접 형광등을 갈며 본인이 뭐든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혼자 산다고 해서 안쓰러워하긴 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혼자 집에 있으면 누군가를 뒤치다꺼리하거나 귀찮은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찾아온 평화'에 만족하는 그녀의 일상에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지난 주말, 사위가 잠시 앵무새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네요. 아이들이 동물을 원해 앵무새를 키우기로 했다는 사위는 모처럼 가져온 앵무새를 '아이들이 무섭다고 기겁을 한다'는 이유로 딱 한 달 동안만 맡아줄 수 없냐고 부탁합니다. 그동안 애들이 앵무새와 살 수 있도록 잘 준비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녀는 얼떨결에 "한 달이면 되는 거지" 하고 말해버립니다. 딸이 어릴 적 학교에 다녀왔더니 키우던 닭이 없어졌다며 목 놓아 울다 "난, 엄마가 진짜 싫어"라고 말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앵무새가 집에 온 지 일주일이 되어가도록 딸은 연락 한번 없습니다. 딸은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뭔가 부탁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사위를 시키게 됐습니다. 지난 주말에 딸이 같이 오지 않고 사위만 보낸 것도 틀림없이 '엄마가 꼴도 보기 싫어' 그랬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는 '콱 죽고 싶어 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앵무새는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합니다. 자지러지듯 소리를 지르고, 눈 깜짝할 새에 밥그릇을 엎는가 하면 때때로 가슴팍의 깃털을 뽑아놓기도 합니다.


얼마 후, 그녀는 앵무새의 상태가 이상해 보여 병원에 데려갑니다. 젊은 의사는 "죄송하지만 그렇게 키우시면 안 돼요." 하고 정중하게 비난합니다. 의사는 그녀에게 앵무새는 관심을 많이 필요로 하는 동물로 많이 놀아줘야 한다고, 안 그러면 외로워서 죽는다고 다그칩니다. '죽더라도 내가 데리고 있는 동안에는 안 되지' 생각하며 그녀는 앵무새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이제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물과 사료를 갈아주고, 한 시간마다 새장을 열어 바닥을 거닐 수 있게 해 줍니다.


'극성스러운 손주'라고 생각하던 앵무새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 건 고작 며칠이 지난 후였습니다. 가끔은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앵무새를 그녀는 사랑하게 됐습니다. "장모님, 죄송한데요. 한 달만 더 부탁드려요 될까요?" 하고 전화를 걸어온 사위에게 그녀는 흔쾌히 "한 달 정도는 더 맡을 수 있어" 대답합니다.


그녀는 심지어 앵무새와 함께 산책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휴대하기 좋은 초소형 이동장까지 구매한 그녀는 앵무새와 함께 천변을 걷네요. 그렇게 걷다 보면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며 신기한 듯 킥킥대며 지나가곤 했지만 그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앵무새와 천변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가마득히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이 자꾸만 그녀를 찾아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였던 '춘식이 삼촌'에서 얼굴이 까맣고 보조개가 귀여웠던 친구 '점선이', '운동회 날에만 가게 쉬고 학교에 와주면 안 되냐'던 딸아이의 부탁을 거절하던 날까지.


"장모님 드디어 데리러 갈 수 있어요." 사위는 밝게 이야기합니다. 앵무새는 가버렸습니다. 그녀는 모든 게 이전으로 되돌아간, 평화로운 일상을 드디어 되찾습니다. 다시 자신의 일과를 그대로 지키며 살게 된 그녀는 이상하게 '천변'에는 한동안 나가지 못합니다. 천변의 모든 풍경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네요.


앵무새 생각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던 밤, 그녀는 미쳐 버리지 못한 노트를 꺼내 빈 페이지를 펼칩니다. 무언가 쓰고 싶었지만 좀체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강사는 수업 시간에 글을 쓰기 위해선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너무 무서워'라고 생각합니다. 한참을 고민해서 쓴 건 '앵무새'였습니다. 그러다 '앵무새가 갔다'라고 쓰려다 '가버렸다'라고 고치는 그녀. 그 문장을 보자 너무 고통스러워 눈을 감아야만 했던 그녀.


그녀에게 그 시절은 틀림없이 앵무새가 전부였고, 앵무새에게도 그녀가 전부였습니다. 사람도 아닌, 작디작은 고작 앵무새 한 마리는 어째서 그녀의 삶을 그토록 깊게 파고들었을까요?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또다시 사랑이 찾아오다니. 또다시 상실할 걸 알면서도 마음을 주다니.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36쪽)




3. 상실에도 아랑곳없이


"Tis better to have loved and lost than never to have loved at all." 이 말은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In Memoriam AHH(아서 헨리 핼럼을 기리며)'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구 중 하나입니다. '사랑하고 잃는 것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소설 속 그녀는 아주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던 중 앵무새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수많은 상실의 시간을 관통하며, 필연히 사랑은 곧 상실을 꼬리로 달고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새 칠십 대 노인이 되어버린 그녀는 사랑하고 상처받을 용기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코 사랑에 빠집니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사랑하고 상실합니다. 대체 무엇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하는 것일까요? 또다시 상실의 시간이 찾아온 그녀는 이전과 똑같은 기계적이고 허무한 일상을 살아가게 될까요, 아님 다시 사랑할 용기를 지니게 될까요?


소설의 말미에서 글쓰기에 아무 관심이 없던 그녀는 두 단어의 짧은 문장을 씁니다. 마음을 바라보는 고통을 참아가면서요. 오롯이 자신의 마음에 마주할 용기가 그녀에겐 생긴 것입니다. '작은' 앵무새가 일으킨 '작은'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토대로 그녀가 다시 일어서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 '사랑'은 사람을 살게끔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상실의 슬픔을 잊게 하니까요. 역시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야 사랑하는 게 조금 더 낫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