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생애』 - 이승우 / 사랑의 숙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by 조창
image.png 『사랑의 생애』, 2017년 3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사랑의 생애』, 8쪽)




1.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좋은 소설은 첫 문장부터 뇌리에 깊게 박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라는 첫 문장으로 이야기를 여는데요. 이 문장은 소설의 제목과 전체 내용을 담백하게 함축합니다. 사랑은 사람이 주체적으로 일으킬 수 없는 어떤 '사건'과 같고, '기적'처럼 사랑에 걸리게 되면 주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사랑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숙주가 기생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의 의도에 따라 조종당하는 것처럼, 사랑에 감염된 사람은 마치 본인의 의지로 사랑을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실제론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빠질 사랑의 웅덩이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기생체의 선택을 유도하는, 기생체의 마음에 들 만한 숙주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 선택이 숙주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사랑의 생애』, 10~11쪽)


결국 사랑은 사랑 이외의 것으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설렘이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설렘을 만들어냅니다. 수려한 외모나 매력적인 몸매가 사랑을 형성하지 않고, 사랑이 '그것들에 빛을 비추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뿐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별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지어내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경험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보고서를 쓴다는 것이 이 소설을 쓸 때의 작의라면 작의였다. (작가의 말, 4쪽)


이승우 작가는 이러한 사랑의 주체성과 사랑하는 사람의 수동성을 마치 보고서를 작성하듯 낱낱이 파헤칩니다. '작가의 말'에서 그가 말했듯, 그는 현미경으로 사랑 그 자체를 관찰하며 사랑에 관해 이야기될 수 있는 다양한 질문에 대답합니다. 어째서 인간은 둘 이상의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는지, 왜 사랑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무슨 까닭으로 사랑은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리기도 하는지,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줄 수 있는지…. 사랑으로 말미암아 논의될 거의 모든 이야기가 이 소설에 담겨있습니다.


내가 처음 사랑하고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 그 사람이다. 그러니 어쩌겠니.
(『사랑의 생애』, 280쪽)
말하자면 젊은 날의 그의 어머니처럼, 그래서 아플까 봐, 그래서 약해지고 비참해지고 어둠 속에서 술에 취해 울고 낙오할까 봐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혼란을 느꼈다. 그는 자기가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아주 잘못 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참 후에 그는 겨우 신음처럼 물었다. 사랑이, 대체 뭐예요?
(『사랑의 생애』, 282쪽)


이 소설은 결국,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종착점에 다다릅니다. 이 질문은 소설 속 인물 '형배'가 어머니에게 뜻밖의 소식을 들으며 구체화되는데요. 오래전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떠나버린 남편에게 연락을 받고, 다시금 사랑을 느끼며, 결국 그의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하는 어머니를 보며 형배는 사랑이 뭔지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밝고 강하고 충만한' 것만이 사랑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어둠과 결핍과 하락' 또한 사랑의 속성임을 인정합니다.


결국 『사랑의 생애』는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분석해 보여주는 일종의 ‘보고서’이자 ‘실용서’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형배가 자신과 어머니의 사랑 경험을 모두 직면하고서야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깨닫듯이, 우리 역시 사랑을 미리 정의하려 애쓰기보다 그것이 삶 속에서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온몸으로 경험하며 이해해가는 과정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책을 다 덮은 지금도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명대사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은 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앞으로 알아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잘 알던(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 숙주 안에 깃들어 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30~31쪽)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건의 속성이다.
(36쪽)


사랑을 위한 행동(예컨대 아버지의)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인생을 망가트리기도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의식했을 때 사랑은 끔찍한 것이 되었다.
(87쪽)


사랑을 잃은 사실보다 사랑이 사라진 이유에 마음을 더 쓰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89쪽)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같은 말을 하면서 다르게 사랑한다.
(146쪽)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 '사랑하기'라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랑이다. 이 기적의 주체는 사랑이다.
(…)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 안에 포섭되어 있다. 이 철학적 진술에 기대어 말하면, 사랑은 모든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게 하는 근거이다.
(166쪽)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167쪽)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
(228쪽)


우리는 때로 자기의 사랑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이미지의) 훼손을 감수한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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