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앞으로 절대는 드라마 작가를 한다고 설쳐대는 일은 없을 거였다. 드라마 보면서 욕도 안 하기로 결심했다. 결말에 주인공을 다른 남자랑 결혼시켜도, 끝까지 주인공의 남편을 알려주지 않아도, 그리고 결국 그게 꿈이었더라도, 왜 작가가 저렇게 마무리하냐고 절대 욕 안 하기로 했다.
서너 편 정도 쓰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 느낌 아니까.
중도 포기.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알람을 걸어두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것. 이게 포기라면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이건 현명한 손절인데... 그동안의 시간과 비용, 그리고 내 노력을 생각하면 맘에 차지 않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가지 않을 길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었다. 그리고 나의 20대 후반을 마음껏 꿈꾸고, 마음껏 달리고, 마음껏 해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좋게 포장하려 해도, 드라마로 치자면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용두사-망'정도의 이도 저도 아닌 드라마였다. 그 말인 즉, 욕먹을 타임이라는 거였다.
정신 차려보니 회사 일은 가득 밀려있었다. 오랜만에 회사에 찾아온 내 마음은 '들리지 않는 욕'을 온몸으로 느끼며 일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 작품을 위해 애써주신 우리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 그리고 애증의 사원께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분들은 내가 드라마 작가로 성공했으면 인터뷰할 때 꼭 언급해드리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다. 물론... 그분들은 본인들이 아쉬워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신다.
칼퇴는 무슨. 저녁 먹고 야근해야지. 오랜만이라 그런지 야근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어색하긴 했다. 그러나, 드라마 작가보단 회사의 내 책상이 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내 자리 맞는 것 같다. 내가 어려서 세상을 몰랐었나 봐.' 이렇게 차차 어른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옆에 계신 대리님처럼...
도대체 난, 퇴근 후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렸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