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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 Oct 19. 2020

합정동에서 표류하기


 2011년 첫겨울부터 마포구 합정동에 살기 시작했다. 경기권에서 학교를 통학하며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길가에서 쓰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합정에서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 댁에 비어있던 방으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서 방 한 칸을 차지했던 것이 합정 살이의 시작이었다. 명동 가게로 일찍부터 나가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 덕분에 집은 거의 비어있게 마련이어서 학교를 늦게라도 가는 날에는 집 전체를 전세낸 기분으로 살았었다.




나는 그 당시 합정동을 좋아했다. 그때에 합정동은 2020년 지금처럼 그렇게 북적이는 곳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홍대 주변에 나름 블로그로 유명해진 가게들이 즐비했고, 조금씩 올라가는 임대료 때문인지 상수역 주변까지 자영업자들이 내려와 있었지만 아직 합정, 특히 내가 살았던 당인리 주변은 정말로 서울의 어느 한적한 거주지역과 다를 바 없었다. 동네에서는 아직도 30년 넘게 쌀을 집집마다 빨간 오토바이로 배달을 나가는 쌀집 주인 할아버지가 있었고, 역에서 집까지 들어오는 길에는 또봉이 치킨집이 치킨을 한 마리에 9900원에 팔고 있었던 때였다. 동네에는 내 생각 이상으로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많이 살고 계셨고, 당인리는 그런 동네였다. 그래서 지금의 멋지고 힙한 카페들이 즐비한 동네 분위기와는 또 사뭇 다른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군 휴학을 끝내고 복학하던 2014년에 근 2년 만에 돌아온 합정은 예전보다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예전보다는 카페가 좀 더 많았고, 비어있던 공간 중간중간에는 수제 맥주와 프라이를 파는 인테리어가 아주 멋진 가게들이 들어와 있었다. 노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복학생에게 이러한 변화는 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찍 학교에서 돌아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집에 일찍 들어가기보다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과였다. 가게를 구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학생의 얇은 지갑 사정과 대학생에게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비싼 예쁜 카페들의 음료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좀 덜 디자인된 카페더라도 학교 주변처럼 내 지갑 사정에 맞는 커피집 하나를 바라곤 했던 것 같다.


 내 학년이 한 학년씩 올라갈수록 동네도 차츰 변화해 나갔다. 쌀을 배달받던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동네에서 이사를 가시게 되면서 쌀을 배달하던 할아버지의 모습도 차츰 안 보이게 되었고, 길목을 지키고 있던 또봉이 치킨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예쁜 카페가 새 단장을 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또 1년, 쌀집이 있던 자리에는 그 옛날 쌀집 모양을 그대로 살린 콘셉트로 술집이 들어오게 되었다. 가게는 꽤 멋진 모양새였지만 예전의 동네를 구성하던 풍경을 다시 못 보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였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잠시 강남 지역으로 거취를 옮기기도 하였다. 강남살이를 위한 집은 술집이 많아 잘 시간에도 바깥이 시끄러운 합정과는 달리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지역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합정이 시끄러워지면서 나도 덩달아 붕 뜬 상태로 살았었구나 하는 것들을 깨닫기도 하였다. 실제로 동네가 시끄러워지게 되면서 집에 오면 제대로 쉬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고, 실제로 너무 멋진 카페와 음식점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집에 있기보다 밖으로 나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가지고 거주했었기 때문이다. 노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시기와 다르게 졸업을 한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차분한 감정으로 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는데, 퇴근하고는 잘 집중을 못하던 것이 동네를 바꾼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올라간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스타트업 허슬에 심취해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기에, 여러 스타트업 씬의 인물들의 글을 탐독하기도 했는데 그중 폴 그레이엄의 Cities and Ambition 이라는 에세이에 큰 감명을 받았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각각의 도시는 그 자체로 풍기는 느낌과 에너지가 있고, 이러한 에너지는 특정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사는가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다.

 도시를 다루는 폴 그레이엄보단 조금 스케일이 작은 이야기이지만 합정을 떠나 살면서 이러한 이야기에 더욱 공감했던 것 같다. 합정이 풍기는 어떤 에너지는 자유와 젊음에 가까웠다고 한다면 강남살이를 하며 살았던 동네는 차분함과 일상생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합정이 풍기는 에너지 덕분에 만났던 사람들을 돌이켜보면 같은 Ambition을 공유할 수 있었던 그 때의 나에게는 정신적인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그리고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근무 여건상 다시 합정으로 돌아오니 그 몇 년 사이에 또 못 보던 가게들과 더 많아진 유동인구가 단번에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젠 이러한 활기가 반갑다. 그래도 학생 때 보다는 여유로워진 지갑 사정 덕분에 골목마다 있는 개성 넘치는 카페들이 예전보다는 멀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리. 두 번째 합정살이에는 예전보다는 침착한 거주 생활을 위해 노력해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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