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모든 걸 지치게 만드는 계절은 가슴속에 끊임없이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애리조나와 유타의 경계선에서 두 번째 맞는 칠월의 열기는 꿈을 녹여 흔적을 지웠고, 꿈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올려진 현실이 낯설었다. 낯섦은 곧 꿈으로부터의 멀어짐이란 것을 배웠고, 꿈과 현실의 거리에 익숙해질 때 사람의 마음도 현실적 거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가지고 있던 걸 잃어버리고, 빈자리에 익숙해져간다. 텅 빈자리엔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고,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수도 있단 걸 배워가던 사막에 메마른 바람이 불던 계절이었다.
“아들 연애해야지. 아주 맘에 쏙 드는 아가씨가 있어.”
“어머니 저 예쁜 여자 좋아합니다.”
“그려. 정신 못 차렸지. 근데 이 아가씨 예뻐. 좋은 아가씨야. 연락해봐.”
“보통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살림 잘 하고, 아기 잘 낳을 것 같은 후덕하게 예쁜 여자 말고요.”
“언제 철들까. 좋은 사람이니까 연락해봐. 그리고 예뻐.”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신남이 묻어난다. 가끔 맘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혼기를 훌쩍 넘은 아들에게 소개해 주려 부단히 노력하시는 어머니, 그 아가씨가 무척 맘에 드시나 보다. 예전과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문득 부모님이 맘에 드는 아가씨를 아들에게 소개해 주려는 마음은 어떤지 궁금하다. 결혼을 해야 부모님도 되기에 이런 궁금증은 곧 결혼할 마음이 없지 않은 것임을 상기한다. 아버지 역시 이 아가씨가 퍽 맘에 드시는지 전화해보라며 긴 설득 끝에 명함까지 사진 찍어 보내주셨다. 명함에 손수 적은 전화번호의 글씨체가 익숙지 않다. 기억 속에 아버지는 글씨를 잘 쓰셨다. 분명 아버지의 멋진 글씨체는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이 놀리던 유명한 내 악필과 닮은 듯 약간 투박한 글씨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괜스레 명함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그 아가씨의 멋 내지 않은 정직한 글씨라고 말씀해 주셨다.
관광 일을 하다 보니 일 년에 약 천명 정도의 사람들을 만난다. 결혼을 아직 안 했다는 것을 알면 항상 사람들은 똑같이 말한다. 이번에도 한국에서 온 어린 친구가 속 편한 소리를 한다.
“그냥 한국에서 여자 데리고 오면 안 돼요?”
어디까지 대답해 줘야 할지, 해줄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뭔지 잠시 생각한다. 코로 내쉬는 한숨과 같이 고개는 떨어지고, 들이쉬는 숨과 함께 감은 눈은 하늘로 향한다. 사람과 나누는 대화가 싫은 나날이었다. 뻔히 형식적인 질문을 하고, 당연한 대답이 나올 것을 예상하며, 좀 색다른 답이 나오면 관심을 갖는 척한다. 의미 없는 대화가 오고 가는 낭비도 싫고, 관심을 갖는 사람의 대수롭지 않은 흥미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열렬히 사랑하다 떨어져 있는 거면 괜찮은데, 이미 떨어져서 시작하면 사랑이 되기 힘든 것 같아. 그 사람이 힘들 때 난 옆에 있어줄 수가 없거든.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어. 그래서 그 사람이 아프면 반나절이나 늦게 알게 되지. 눈을 마주 보고, 체온을 나눠주며 보듬어 줄 수가 없어. 떨어져 있다는 거리 감각을 사랑보다 먼저 실감하는 거야. 그 느낌은 생각보다 차가워.”
“아, 그렇겠네요. 그래도 사랑은 타이밍이라 하는데 타이밍이 맞으면 되지 않을까요?”
“갑자기 타이밍? 그리고 대상이 누군데?”
“저야 모르죠.”
“나도 모르겠는데. 우리 쓸모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사람들은 인생, 사랑 모두 타이밍이라 말한다. 한 번도 좋아했던 적이 없는 말이다. 노력과 열정, 사랑 등등 다른 무언가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순간의 우연으로 결정되는 말.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금씩 이해하는 말. 삶은 타이밍이다. 감정이 만나는 교차점이 어긋나면 내 열정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으로 다가간다. 노력하는 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했지만 갖춰야 할 기본이며 거기에 찰나의 기회까지 맞아야 한다.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서로 노력하는 인연을 만나는 아주 짧은 접점을 보통 사람은 모르고 지나친다는 것을 배워간다. 그래서 사랑할 때 현실적 거리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언젠가 가르쳐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아들, 엄마가 말한 현선 처자랑은 연락 좀 하나?”
“아직이요. 한국과 미국 너무 멀어요.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흐지부지한 관계가 될 거예요. 그리고 제 상황도 있고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저울질하기도 벅차요.”
“그래도 연락해봐. 정말 좋은 아가씨야.”
“예. 생각나면요.”
부모님께 그 아가씨를 소개받고 한 달이 지나서야 첫인사로 서로 연락하지 말자며 문자를 보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그녀에게 미안했고, 부모님께 죄송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어머니, 아버지께 죄송했다. 귀여운 딸이 무례한 문자를 받았다는 걸 아신다면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 모두에게 미안했지만 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도 가슴이 먹먹한 상황이었기에 스스로 핑계를 대며 합리화했다. 마음이 아직 다 자라지 못해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에게 항상 미안했고 가끔 생각났다. 눈동자를 굴리면 또르르 소리가 날 것 같은 큰 눈이 어디로 시선을 돌리고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계절의 소리가 변한다. 가을바람은 Labrinth의 Beneath Your Beautiful을 노래했다. 꿈이 바람에 실려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름다운 꿈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있을까. 노란 담요 같던 따스한 겨울 달빛은 Debussy의 Claire de Lune가 불러주는 선율을 따라 피아노 위에서 춤을 추었다. 삐쭉빼쭉 튀어나온 꿈의 갈망을 담요와 잘 어울리는 둥근 베개로 폭신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계절은 매번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는 그녀에 대해 변함없는 이야기를 하셨다. 계절의 언어 그 울림과 정적 사이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었을까. 부모님의 재촉과 그녀에 대한 미안함으로 실례인 것을 알고도 가끔 문자를 보냈다. 겨울바람을 타던 문자가 유난히 따뜻했다. 겨울이 지나가는 소리가 답장 속에 담겨 천천히 걸어온다.
“아들! 현선 처자 만나서 서로 연락하는지 물어봤는데, 예의 없이 말했더구먼! 그런데도 화 많이 났었다며 활짝 웃는데, 그때 홀딱 반했지 뭐야.”
그 후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변함이 없으셨다. 얼마나 그녀가 맘에 들었으면 매번 전화할 때마다 이러실까.
겨울의 구석엔 몸을 동글게 말고 앉아 추위를 버티던 네로가 있었다. 노란 호박색 눈을 가진 작고 검은 고양이다. 네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온몸을 물어뜯으며 싸웠다. 네로와 사람들 모두 상처 입었던 겨울의 끝자락이다. 네로를 구하고 나서야 안도감에 다리가 풀렸고, 그녀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봄 향기와 함께 피어났다.
고양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녀와 여러 번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문자엔 배려와 순수함이 담겼다. 요즘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왜 그녀를 좋아하시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 차가운 공기는 아직도 낮게 깔렸지만 햇살이 익숙한 체온으로 연인처럼 안아준다. 들판 위 봄 햇살은 아무 말 없이 살포시 내려앉아 노란 꽃이 된다. 발끝에 봄이 물든다.
밤 호수를 찾아갔다. 고요가 어두운 하늘로 퍼지는 종소리를 닮은 곳이다. 별이 눈물을 흘려 호수에 파묻힌다. 봄바람은 겨울 흔적을 아련하게 묻힌다. Rewrite the Stars를 차 오디오로 크게 틀었다. 담배를 물고 음악이 쓸쓸한 하늘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바라본다. 두 눈도 그때 흔들렸다는 걸 뺨이 젖고 나서야 알았다.
You know I want you.
It's not a secret I try to hide.
I know you want me, so don't keep saying our hands are tied.
You claim it's not in the cards, but fate is pulling you miles away and out of reach from me.
But you're here in my heart, so who can stop me if I decide that you're my destiny.
What if we rewrite the stars?
Say you were made to be mine.
Nothing could keep us apart.
You'd be the one I was meant to find.
It's up to you, and it's up to me.
No one can say what we get to be.
So why don't we rewrite the stars?
Maybe the world could be ours tonight.
You think it's easy.
You think I don't want to run to you.
But there are mountains, and there are doors that we can't walk through.
I know you're wondering why.
Because we're able to be just you and me within these walls.
But when we go outside, you're going to wake up and see that it was hopeless after all.
No one can rewrite the stars.
How can you say you'll be mine?
Everything keeps us apart and I'm not the one you were meant to find.
It's not up to you.
It's not up to me.
When everyone tells us what we can be.
How can we rewrite the stars?
Say that the world can be ours tonight.
All I want is to fly with you.
All I want is to fall with you.
So just give me all of you.
It feels impossible.
It's not impossible.
Is it impossible?
Say that it's possible.
How do we rewrite the stars?
Say you were made to be mine?
Nothing can keep us apart.
'Cause you are the one I was meant to find.
It's up to you, and it's up to me.
No one can say what we get to be.
And why don't we rewrite the stars?
Changing the world to be ours.
You know I want you.
It's not a secret I try to hide.
But I can't have you.
We're bound to break and my hands are tied.
슬픈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랑이란 감정도 겨울에 튼 입술을 닮았던 시간이었다. 바람이 눈가를 스쳐갔지만 시리진 않았다. 하지만 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갈라진 입술 위를 지나갔을까.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몇 시간 못 자고 깨어났다. 세상은 어두운 그대로였다. 마지막 별이 긴 흔적을 남기며 호수로 떨어진다. 얼마 안 지나 그 반동으로 오렌지색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해는 바쁜 일상을 지나간다. 적막한 호수에서 들었던 노래가 아릿하게 심박수를 맞추던 하루였다. 항상 뒷마당으로 나가서 서성이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앞마당으로 나갔다. 요즘 힘들다는 그녀에게 호수에서 찍었던 별 사진을 몇 마디 문자와 함께 보내주었다.
‘힘들수록 힘내는 거예요. 어두워도 별은 항상 빛나고 있으니까’
오른쪽 눈의 시선이 닫는 곳으로 떨어지는 별이 품으로 안겨 들었다. 달이 숨어 흔적을 지운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그녀와 내가 바라보는 별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삼월에 물고기자리는 지금 어디쯤에서 빛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