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과 음악
'달빛이 머문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녀도 우유팩을 열어 컵에 따를 때마다 우유가 흘러 손에 묻었다. 방 안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은 자연스럽게 공기 중에 퍼져 잔잔한 여운으로 스며들고 있다.
언젠가 공원을 산책 중에 그녀가 말했다. 밤하늘의 고요가 세상에 조용히 울리는 것을 느껴본 적 있느냐고. 세상이 고요의 담요를 덮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들기 전, 10초 정도 숨을 멈춘 후 다시 천천히 내쉬면 그 사이 하늘이 마법을 부려 고요가 보슬비로 내린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지금. 느껴져? 끊어질 듯 말 듯 짜르르 이어지는 저 하늘의 숨소리? 꼭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의 숨소리 같잖아. 이걸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아마 내 상상일 거야. 넌 나와 다른 상상을 할지도 몰라. 혹은 전혀 못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 느낌을 네가 알 수 있다면 좋겠어. 우리는 같은 상상을 하는 거잖아."
감은 눈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그녀, 고개를 가만히 하늘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언제나 그녀는 내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걸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그랬다. 난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잡아야 편한데..... 하지만 마음의 안정이 놓이는 왼쪽 자리를 언제나 그녀를 위해 내어 주었다.
기억 속의 그녀는 수채화로 남겨졌다. 비가 오면 금방이라도 흘러내려 지워질 것 같았다.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선 물을 머금은 물감처럼 공기 중에 수분을 흘려보내듯 은은한 향기가 있었다. 그녀는 밤하늘의 고요를 공유하길 원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눈으로 담을 수 있는 작은 스케치북 안에, 그녀가 잔디와 하늘 사이에 서 있는 풍경을 그리기 바빴다.
요 며칠 하루의 대부분을 공원에서 보냈다. 으레 그녀가 그랬듯 때론 책을 가져가기도 했고 커피를 가져가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허비하며 개미가 만든 기차를 관찰하다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중인 아줌마와 공원 관리인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기도 했다. 해질 무렵 배가 고프면 햄버거를 사서 어느새 지정석이 된 벤치로 돌아왔다. 해가 지고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에 놀란 곤충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앉아 있었다. 사람은 햄버거만 먹고 살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혹은 담배를 몇 가치나 연달아 피워야 죽을까 등등 쓸모없는 상념들이 무료함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 와중에 줄담배 피우기 실험을 해보니 네 가치 이상 연달아 피우기 힘들단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공원은 나와 어울리는 장소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내 마음속에 폭풍이 들어있다고 핀잔을 줬으므로 공원보단 황량한 사막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래야만 누군가 다치거나 사라져 가는 것들이 그나마 적을 것이기에.
공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었을 때 창문의 블라인드를 열어 놓은 채로 집을 나섰던 것을 알아챘다. 블라인드를 열고 닫는 손잡이는 가지런히 십일 자를 만들어 드리우고 있었고, 달빛은 과자 부스러기처럼 곱게 바스러져 마름모꼴로 방안에 흩뿌려져 있었다. 양초를 켜 놓은 듯 은은히 주위를 밝혀가는 달빛 도형의 경계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다 익숙한 고무줄 머리끈을 보았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녀는 머리끈은 한번 잃어버리면 찾기 힘드니 여러 개를 사다 놓아야겠다고 했었다. 머리끈 대신 비닐 랩으로 인디언 추장을 흉내 내며 앞머리와 윗머리를 질끈 동여맬 때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린 많이도 웃었다.
추억이 된 기억을 끄집어내자 마음속에 비바람이 친다. 그대로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가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초겨울 짙은 남색의 어두운 하늘과 꼭 닮은 색을 띤, 얼어붙은 도로 위를 브레이크가 없는 것처럼 미끄러져 달린다. 하늘과 도로를 구분하기 힘들어 속이 울렁거린다. 뒤죽박죽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추억은 엔진의 굉음과 함께 그녀의 기억을 강요하듯 시끄럽게 소리친다. 타이어가 접지력을 잃는다. 차가 요동칠수록 거세어져가는 감정의 폭풍이 몸을 뚫고 나오려 심장을 세차게 두드린다.
익숙한 풍경. 우리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린 곳이다. 며칠째 삶을 허비하는 공원, 마음속에 인 폭풍과는 반대로 이곳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항상 가던 벤치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선 우리가 누워 있던 잔디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붕 위에 걸려있던 달은 어느새 과거의 우리 위에 떠 있다. 그녀는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의 안경을 종종 주머니에서 꺼내어 쓰곤 했다. 그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서 팔을 크게 두 번 돌리고 오른쪽 주머니에서 상상의 안경을 꺼내어 노란 겨울 잔디 위로 초록색 물감을 덧씌운다. 그리고 소나기가 그립다고 말하던 그녀와 함께 했던 늦여름의 계절 속으로 들어간다. 그 공간 속엔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그녀의 숨이 여전히 따듯한 채로 남겨져 있다.
'John Green'은 'Looking for Alaska'에서 'If people were rain, I was drizzle and she was a hurricane'이라고 했다. 우린 참 반대구나. 사박사박 잔디 밟히는 소리가 좋다. 문득 정적이 깨졌음을 느낀다. 어지럽던 폭풍도 사라지고 없다. 누어서 올려다본 하늘엔 그녀의 동그란 머리끈이 우유색 달을 안고 있다. 그녀가 또 우유를 흘렸나 보다. 고요가 종처럼 울린다. 그 소리에 놀란 달무리의 물결이 잔잔히 출렁이다 보슬비가 되어 메마른 피부를 조금씩 적시어간다.
태풍의 두 얼굴을 상기하고 혼란스러운 내 마음도 잠시 편하게 놓아둘 수 있는 이 공원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조금씩 태풍의 눈을 늘려가야 하겠지.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본다. 10시 3분 전. 아무리 노력해도 잊을 수 없던 숫자 10개를 차례로 나열해 본다. 달빛이 바람을 타고 살랑거린다.
음악 링크 '너와 통화하기 3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