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웃을 수 없었는가.
20년도 더 된 영화를 꺼내보자. 오스틴 파워(2007). 관객은 영화 속 화장실 유머에 매료되었다. 영화는 연일 흥행 기록을 갈아 치웠고, 드디어 그 명성이 한국으로 밀려왔다. 결과는 참패. 그들의 화장실 유머에 냉대했고, 주인공 연기력만큼은 인정한다는 동정론까지 얻었다.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주야장천 쏟아내는, 아예 대놓고 웃으라고 만든 영화 <극한직업>. 평일 오후, 천만 영화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메가박스 신촌은 한산했다. 연휴 이후 숨 고르기, 지리적 악조건, 평일 낮이라는 맹점으로 한산함을 이해하는데 충분했다. 문제는 그런 환경에서 코미디 영화를 본다는 게 두려웠다. 추석을 겨냥해 상영했었던 <가문의 영광>, <가문의 위기>도 엄청 기대했다가 피본 케이스였다. 같은 조건이다. 혼자 보는 영화에 휑한 좌석. 술도 같이 마셔야 즐겁듯이 코미디 영화에서 전염되는 웃음은 분위기 고조에 필수 요소다.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결과? 미리 본 천만 관객에게 꺼내기 힘겨운 대답이다. 재미없었다. 적재적소의 유머가 아니라 시종일관 쏟아내는 개그 코드는 금세 피로감이 찾아왔고, 언젠간 터지겠지 하는 기대감도 무력해졌다. “난 한 놈만 패”라고 부르짖었던 주유소 습격사건 속 유오성을 진선규가 오마주 하기엔 부족했다. 보통 평이 이랬다.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영화’, ‘작품성은 부족하지만 오락영화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다른 이들이 느끼는 큰 장점이 사라지니, 그로 인해 덮어졌던 단점들만 보였다. 진짜, 갈비도 아니고 치킨도 아니었다. 최소한 나에게. 악평은 주위에 나밖에 없다. 내가 분명 이상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