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을 살 차례다. 강원도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이라 몇 군데 들러보기로 했다. 상행선 고속도로와 접점이 있고 오일장이 열리는 지역으로 좁혔다. 마침 가장 잘 아는 홍천군이 조건과 맞았다. 수확과 재배가 겹치는 가을이라 장터는 풍성했다. 가게 앞 매대에 가을 모종이 종류별로 깔렸다. 양파, 배추 등 아는 채소부터 약재, 허브 등 낯선 모종까지 보는 재미가 생겼다. 텃밭 초보라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주저주저 눈으로만 쇼핑하다가 먼저 물어보는 상인에게 용기 내어 내 수준에 맞는 모종을 간택받았다. 무농약으로 재배할 경우, 병충해가 덜 노출되는 작물로 시작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잎채소보다는 줄기나 뿌리채소를 권해주셨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작물을 하나씩 사서 실험 삼아 키우고 싶었다. 욕망의 한 정점을 찍을 무렵 변덕이 생겼다. 서울에 도착한 후 바로 텃밭에 가는 여정이 아니라, 굳이 홍천에서 살 이유가 없었다. ‘서울에서 사면 되잖아’, ‘오히려 좋은 물건을 대량으로 살 수 있을 거야’. 나 홀로 타협이라고 하지만, 이미 결정의 추는 기울었다. 결국 홍천에서는 시장 파악만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모종 구매에 앞서 텃밭의 상황을 살폈다. 저번 주 균을 배양하고 그 위에 잡초를 덮은 모습이다. 이틀 전, 비가 많이 내린 덕에 흙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모종 심기 좋은 상태였다. 모종을 구하러 근처 공덕시장에 향했다. 텃밭의 구성을 상상하며 시장에 도착했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봉착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모종 파는 상점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시장에서 나와 근처 꽃가게들을 돌아봤는데, 역시나 채소 모종은 판매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두 발을 멈추고 휴대폰 검색에 들어갔다. '마포'와 '모종'의 키워드를 입력했지만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마포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망원시장으로 이동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전환되면서, 불안의 그늘만 깊어졌다. 어느 정도 포기할 무렵, 망원시장과 월드컵 시장 사이 도로에 있는 꽃가게에서 유레카를 외쳤다. 작은 모판 2개에 반도 안 되는 모종을 발견했다. 꽃집 앞 도로 한켠에 소외되어 구조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총 35개의 모종 중에 10개는 배추, 25개는 무였다. 무조건 다 사가기로 하고 가격을 물었다. 모종 1개에 200원, 총 7,000원, 생각보다 저렴했다.
‘모종 전부 구조’에 사로잡힌 나머지, 내 텃밭의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다. 보통 배추와 무는 저 크기의 텃밭에 4개 정도가 적당하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4줄에 4개씩, 총 16개의 모종이 필요한 셈이다. 그런데 내가 가져온 모종은 35개. 선별작업이 필요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 뿌리가 마른 것도 보이고, 자란 이파리 자체에 히마리가 없어 미래가 어두운 모종도 있었다. 건강한 순위 별로 자리를 내주고, 모종 간의 간격을 좁혀 몇 개 더 심었다. 그래도 모종이 남아서 친구의 남은 텃밭에 심었다. 세 줄은 무를, 나머지 한 줄에는 배추를 심었다. 총 26개(무 21개, 배추 5개)의 모종에 물을 듬뿍 줬다. 우여곡절 끝에 생명이 흙에 안착했다. 뭔지 모를 책임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