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야구장
매년 봄, 나는 새로운 도화지를 받아 든다. 이전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찢겨졌거나 얼룩이 남았더라도, 새 도화지 앞에서는 모두가 초심자가 된다. 야구팬도 다르지 않다. 지난 시즌의 상처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매년 ‘올해는 다를 거야’라는 주문을 속삭이며 다시 펜을 든다. 희망은 반복의 예술이고, 야구는 그 예술의 완벽한 무대다.
두산 베어스의 지난 2024년은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불구하고, 한때 ‘왕조’라 불리던 시절의 찬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늘 성적에 일희일비하며, 때로는 스스로의 ‘설레발’에 웃고 울었다. 그만큼 진심이었다. 2025년은 다르리라 믿었다. 이승엽 감독의 마지막 계약 시즌이란 사실이 어떤 예감처럼 가슴에 맴돌았다. 그래서 3월, 아직 겨울의 그림자가 남은 하늘 아래 나는 다시 도화지를 폈다.
3월 29일, 개막전의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아침엔 눈발이 흩날렸고, 관중들은 마치 겨울 사냥꾼처럼 두꺼운 외투에 몸을 숨긴 채 잠실야구장으로 모여들었다. 홈팀은 두산 베어스, 원정은 삼성 라이온즈. 올해의 첫 단관이었다. 함께한 코둘 야구소모임 멤버 네 명은 각자의 응원색으로 무장해 있었다. SSG 팬 주연, 키움 팬 미래, 삼성 팬 성영, 그리고 나 — 두산을 믿는 사람.
표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예전엔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 티켓을 끊고 들어갔지만, 이제는 아이돌 콘서트 못지않은 예매 전쟁이 펼쳐진다. 시대가 변했고, 그만큼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공동의 서사’가 되었다. 경기장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극장처럼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올해부터 두산은 오랜 휠라와의 동행을 마무리하고 아디다스와 새로운 스폰서 계약을 맺었다. 경기장 밖 풍경도 이전보다 한결 세련되고 젊어 보였다. 아디다스의 글로벌 슬로건은 “You Got This”, 한국어로는 “널 믿어”. 이 단어는 단지 광고문구가 아니었다. 두산 팬으로서 구단에 보내는 우리의 신념,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했다. 김택연 투수가 등장한 영상 속 “혼자가 아니니까, 널 믿어”라는 자막은 이상할 만큼 가슴 깊은 곳을 두드렸다. 그 말은 마치 팬과 팀이 서로에게 건네는 은밀한 신앙의 언어처럼 들렸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베었지만, 사람들의 열기가 그 바람을 이기려는 듯 피어올랐다. 나는 차가운 맥주를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손을 비비며 경기를 지켜봤다. 4회, 두산이 먼저 두 점을 뽑았을 때만 해도 오늘은 다를 거라 믿었다. 그러나 7회, 8회에 실책이 이어지고 순식간에 점수가 쏟아졌다. 스코어보드의 숫자가 2-13을 가리킬 때, 나는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오래된 감정이 천천히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패배가 익숙해지면 안되는데 말이다.
시즌이 끝난 지금, 나는 그날의 사진을 다시 꺼내본다. 잔디 위의 초록빛이 아직 젖어 있는 듯한, 봄의 첫날이었다. 그날의 나는 미래의 결과를 모른 채, 단지 설렘과 가능성으로만 빛나던 얼굴이었다. 그 웃음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희망이란 결과를 모르기에 가장 순수하고, 실망이란 그 희망을 오래 품었기에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두산 베어스의 이름 옆에 적힌 숫자 ‘9’가 주홍글씨처럼 맴돈다. 그것은 한 해를 통과한 내 마음의 온도이며, 나의 믿음이 남긴 흔적이다. 봄의 들뜸은 여름의 고비를 지나 가을의 고요로 식었지만, 그 여정의 끝에는 여전히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또 내년 봄을 기다린다. 또다시 새 도화지를 펼치며,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펜을 든다. 야구는 어쩌면, 매해 새로 태어나기 위해 실패를 통과해야 하는 예술일지도 모른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러나 아름답게도 다시 믿는다. 내년 3월에도 분명히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올해는 다르리라.”
그리고, 나는 안다.
그 믿음이야말로 야구가 주는 가장 인간적인 위로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