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무섬마을 외다무다리
초등학교 체육시간, 평균대 위에 섰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놀이처럼 보였지만, 내게 그 순간은 오래도록 마음의 메타포로 남았다. 친구들이 가볍게 건너갈 때 나는 자꾸만 중심을 잃고 떨어졌다. 운동신경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작은 실수가 내 안에 큰 균열처럼 남았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알았다. 나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 운동’에 유독 약했다는 것을. 자전거도 한 손을 놓는 순간 휘청거리고, 스키를 배울 때면 늘 가장 늦게 리프트를 탔다. 노력의 문제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내 성정의 일부임을 인정한다. 나는 ‘균형’을 애써 잡으려다 오히려 불안해지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또 받아들인 건, 영주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앞에서였다. 내성천 위에 걸린 그 다리는 약 150미터 길이의 가늘고 긴 나무줄기처럼, 세월의 숨결과 바람의 기억을 함께 품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낭면 그 자체였다. 햇살이 스치면 다리는 황금빛 실선이 되어 하늘과 강을 잇는다. 한쪽에는 고택의 기와가 시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다른 쪽에는 들꽃과 모래톱이 풍류의 향기를 내뿜는다. 그 위를 걷는 일은 마치 흘러가되 머무는 시간, 넘어질 듯 서 있는 삶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다리 앞에서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중심을 잃을까 두려웠고, 아래로 흐르는 물이 나의 ‘워터포비아’를 자극했다. 동료들은 다리를 건너며 신나했지만, 나는 망설이다가 포기했다. 난 외롭지 않았다. 내 옆엔 사랑이가 있었다.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고 내 옆에 서서, 건너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동료들이 다른 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후, 나는 천천히, 흔들리는 나무판 위에 한 발을 내딛었다. 내 몸의 떨림이 다리의 떨림과 섞이며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균형은 안정이 아니라 흔들림을 받아들이는 기술이라는 것을.
동료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나 홀로 어렵사리 다리를 건너다보니 생각이 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를 나는 이렇게 고쳐 읽어봤다. 가장 좁은 곳에서야 비로소 넓은 마음을 배우게 된다고. 도시의 새벽, 가느다란 다리 위에서 두 사람, 오래된 오해와 신념의 칼을 품은 채 마주 섰다고 치자. 뒤로 물러설 공간도, 말돌릴 여지도 없다. 그때 외나무다리는 재판장의 단상도 결투장의 링도 아니다. 서로가 떨어지지 않으려면 균형을 나눠 가져야 하는 철학의 줄타기, 공자의 <서(恕)>가 발목을 붙드는 난간,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이 손잡이로 변해 손을 얹게 만드는 협곡의 다리다. 증오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스스로의 무게로 흔들리고, 분노는 상대보다 먼저 나를 물속으로 끌어당기는 낡은 납덩이임을 깨닫는다. 결국 두 사람은 칼을 내려놓고 상대의 어깨 너머 하늘을 본다. 적대가 아니라 공통의 추락 가능성이 우리를 묶어 두었음을, 그리고 공동의 불안이 공동의 윤리를 부른다는 사실을.
지금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중심을 잘 잡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건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과 나 사이의 긴장을 느끼게 해주는 감각, ‘삶의 미세한 흔들림’을 알아채는 촉수다. 평균대에서 떨어지던 아이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배운 건 단 하나—균형은 넘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마음이라는 것. 삶은 외나무다리처럼 늘 불안정하지만, 그 위를 걷는 순간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얹어 균형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나 스스로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