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고 있다
베를린에서 나의 친구, 지인은 대부분 외국인이다. 유럽 내 국가들은 그들에게 익숙하지만 세계 반대편에 있는 한국은 그들에게 잘 알려진 나라는 아니다.
이틀 전에 영국인 프로그래머 친구와 베를린에서 열린 '한국 독립 영화제'에 갔다.
바빌론(Babylon)이라는 영화관에서 했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곳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무대 옆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는데, 이 연주가 영화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게 만든다. 연주가 끝나면 이어서 흑백 영화와 예술 영화 광고가 나온다. 영화관 크기는 작고 상영관도 하나밖에 되지 않는데 공간이 뮤지컬 극장같이 보인다. 그래서 친구에게 겉으로 볼 때는 커 보였는데 왜 상영관이 하나일까 물었더니, 그래서 락커룸이 그렇게 많고, 화장실이 넓은 거야.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지 하고 받는 영국인 친구 :D 이래서 이 친구와 잘 맞나 보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Still flower'였다. 감독님의 설명이 Steel flower(강철 꽃)처럼 살아가지만 Still flower(여전히 꽃)인 주인공 하담의 스토리를 담아내려고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20대 초에 서울에 상경한 그녀는 집세도 내기 어렵고, 제대로 된 알바 자리를 구해 월급을 제대로 받기도 어렵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과 열심히 싸워나가면서, 틈틈이 취미인 탭댄스를 추며 자신을 위로한다. 영화도 재밌었지만, 더 흥미로웠던 것은 감독님과의 영화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주인공 하담은 집을 구하지 못해 언덕 위에 있는 빈 허름한 집에서 임시적으로 산다. 감독님은 그녀가 집에 올라가는 모습이 시시포스가 바위를 다시 올려놓는 모습과 같았다고 했다. 매일 그녀는 일상과 분투하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흘러갈 때도 있지만, 살아내야만 할 때도 있다.
질의응답이 한국어와 독어로 이루어진 터라, 친구와 중간에 나와서 걸었다. 베를린은 어느새 날씨가 추워서 코끝이 시렸고, 친구와 삶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다. 친구는 한국에 대해서 가장 그리운 게 어떤 것이냐고 물었고, 나는 한국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서로 영국인인 그도, 한국인인 나도 이제는 베를린이 집 같다고 얘기했다. 여전히 한국 영화를 보거나, 음악에 대해 친구랑 이야기하거나, 한식당에 가면 편하지만, 가끔은 내가 베를린에서 사는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주인공 하담처럼(물론 그녀만큼은 절대 아니지만) 처음에 살아내는 과정이 있었기에 그 후에는 베를린이 친근하고 더 애증의 도시가 되었나 싶기도 하고 내 국적에 대해 잊어버리며 지냈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5년 후에 이 글을 보면 겨우 2년 가지고 이런 고민을 했단 말이야 싶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영화는 정말 좋았고, 외국인 친구에게 이게 한국 독립 영화야라고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