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스헤드, 케이프타운
케이프타운에 왔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비행기로 2시간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1년 전에 오기로 해놓고 이제야 왔다. 아쉬움, 서운함 같은 생각이 케이프타운의 뿌연 안개처럼 테이블 마운틴을 휘감으며 맞이해주고 있었다. 생전 처음 오는 곳이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의 마을에 온 것처럼 친숙했다. 배낭을 메고 도로를 건너는 여행객, 보드를 옆에 끼우고 언덕을 오르는 청년들이 요하네스버그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고 비로소 사람 사는 도시에 온 것 같았다.
케이프타운의 상징과도 같은 테이블마운틴과 라이온스헤드가 멀리서 구름과 안개에 싸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여름이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마을답게 공기 가득 습기를 머금고 신비로운 것들은 신비감을 더해가는 계절이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길에 라이온스헤드를 오르기로 결심한다. 한국의 남산을 연상시키며 오르는 자동차 도로는 중턱의 주차장에서 하이킹 코스에 길을 내어주었다. 오후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오르려고 입구에 모여 있었다.
드라켄스버그의 하이킹에서도 맛보지 못한, 등산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었다. 암벽이 많은 북한산을 일부 떼어다 놓은 듯이 소요되는 시간은 30분 내외로 짧지만 평탄한 흙길과 바위 사이로 난 길이 적절히 어울려 있었다. 불뚝 솟은 사자의 정수리까지 목덜미를 둥글게 돌며 까마득한 절벽을 조심스레 걸어가면 케이프타운의 바다와 백사장, 현대식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도시와 테이블마운틴이 파노라마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서쪽 하늘에서 비치는 햇살에 온몸이 땀으로 젖으면 바닷바람이 알맞게 분다.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본 것이 얼마 만인가. 저질이 된 체력이 바닥을 보일 때쯤 정상이 눈높이에서 멀리 보였다. 암벽을 오르듯이 하여 국립공원에서 추천하지 않는 지름길로 먼저 오른 청년들이 걸음을 재촉하였다. 갈증도 고갈된 체력도 그때부터 그만이다. 바람과 하늘과 땀으로 젖은 몸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자아내는 기쁨을 글과 사진으로는 공감할 수 없다. 그대로 그곳의 정상에 서서 서쪽 바다로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머무르고 싶었다.
일정에 없던 등산으로 더 오래 있지 못하고 7시경 내려오는 길을 밟았다. 드라켄스버그의 들판에서 내달린 승마의 질주가 이국적인 체험의 최고였다면 라이온스헤드를 오르는 것은 오래된 기억을 꺼내듯 친숙한 열정의 경험이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어 쓸 수 있는, 편하고 친해서 종종 잊었던 오랜 기억을 오늘 다시 경험하듯 정상에 서서 오래도록 가슴에 담고 있었다. 내려오는 시간은 오르던 시간보다 월등히 짧은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