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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해야 Johaeya Jun 22. 2023

처음인 것은 피차 마찬가지

[들개와 노견] 1부 4화 _섬 출신 들개와 도시 출신 노견의 난리동행



          동료 중 누구는 체중 감량을 위해 헬스장 등록에 이백만 원(두 달짜리 PT 금액이다)을 쓰고, 또 누구는 연인과 헤어진 것이 괴로워서 휴무마다 절을 찾아가 백팔배를 올리고 돈을 보시했다. 매일 밤 회사 식당에는 버려질 잔반들이 쌓였지만 그들 앞에 굶주린 한 존재는 개인의 안녕에 밀려 외면당하고 있었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타고난 팔자라는 게 있다지만 나는 어떤 생명에게 주어진 불공정한 기본권에 분노했고, 그 분노가 또한 모순임을 알고 몹시 혼란스러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살려야 마땅하고, 내일 입에 들어가는 소나 돼지는 죽어도 무관한가. 먹어도 되고, 안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친밀함인가. 친밀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랜 눈맞춤으로 발생하는가. 긴 시간 서로 눈을 맞춘 적이 없다면 그 생명은 고기가 되어도 되는가.



나는 산책길 목장에서 거의 매일 소와 눈을 마주친다. 그 소들 중에 '나는 고기가 되어도 됩니다',라는 눈망울을 한 소는 단 한 마리도 없다.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나는 이 모순을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할까. 인간 또한 짐승이므로 약육강식의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면 끝날 문제인가. 나는 지금 눈앞의 유약한 생명을 살리려고 온 힘을 다 쓰면서도 부족한 힘은 고기로 보충하지 않는가. 삼겹살에 술 한 잔이 떠오르거나 입에 살살 녹는 소고기 한 점이 생각날 때는 어떻고...... 빌어먹을, 소와 돼지를 먹는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생명 존중 사상으로 따져 논하다가는 뇌가 터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고기가 되어도 됩니다,라는 눈망울을 한 소는 없다



'우선순위'가 다르다고 하자. 지금 동료들에게는 죽어가는 개보다 제 몸의 부피 조절과 심신 안정이 우선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일 번이 있듯 지금은 놈이 나의 일 번인 것이다. 그뿐이다. 언젠가 삼겹살이 다시 나의 일 번이 되는 순간이 오겠지만 현재는 '지금' 나의 일 번에게 사력을 다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모두가 구경만 해. 이대로 두면 개는 죽을 거야. 난 평생 후회할 거고. 더 이상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라고 전했다. 그들은 내가 가장 아끼는 애인이고, 오빠고, 언니였다. 한 마디로 "나 사고 칩니다!"를 사전 공표한 것인데 그들의 첫 대답은 날 당황시킬 만큼 모두 같았다. "알았어." 내가 얼마나 지독히 고민했는지를 아는 것이다. 지지해 주는 것 외에는 내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그 간결한 대답 뒤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센터에 함께 가주겠다, 잘 될 것이다......'라며 끝없이 용기를 주었다. 땅에 디딘 두 발이 내 사람들의 힘을 얻고 전보다 단단해졌다.






추정하건대 놈에게는 집이 없다. 그 말은 주인이 없다는 뜻이고, 당연히 동물등록칩도 몸속에 내장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추정은 추정이니 절차는 필요하다. 무엇보다 병원 치료와 동물등록칩 확인이 우선이지만 들개인 놈을 내 손으로 붙잡아 병원이나 동물보호센터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20 콜센터로 유기견 신고 문의를 한 지 30분이 지나자 제주 애니멀 119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개의 상태와 정황을 물었고, 내일 오전 포획 담당자가 포획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연락을 준다고 했다.



통화를 마치고 곧장 카페로 갔다. 회사에서 가장 잘 따랐던(먹을 것을 가장 많이 줬다는 뜻일 테다) 카페 사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사고를 당했는지 개가 많이 다쳐서 나타났다, 방금 유기견 신고를 했고 내가 데려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왜...... 얼마나 다쳤어요...... 내가 그 아이 심장사상충 약도 먹여 왔는데......", 라며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그동안 짱이(카페 사장에게 놈의 이름은 '짱이'였다)와 정을 떼려던 것이 사고로 이어진 것 같아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놈의 기구한 팔자에 서로 눈물바람을 보일 때가 아니다. 내일 포획팀이 회사로 도착할 테니 도와달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자 사장은 당장 집으로 가서 사용하지 않는 케이지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우리가 미리 놈을 케이지에 넣는다면 내일 포획팀이 마취총이나 올가미를 사용하지 않고 수월하게 놈을 센터로 옮길 수 있을 테니 그러자고 했다.



잠시 후 케이지와 노란색 개방석을 들고 카페 사장이 나타났다. 사장은 케이지와 방석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에 샌드위치 제조용 베이컨을 꺼내고, 나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격한 반응을 보이는 놈을 케이지 안으로 유인했다. 턱도 없었다. 케이지가 아니라 평생 벽과 벽 사이에도 갇혀 본 적이 없는 들개다. 고민하다가 놈을 바비큐 비품 창고로 유인하기로 했다. 한 계단씩 절며 내려오는 놈의 발걸음이 너무 위태로워서 한순간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저러다 발을 영영 못 쓰게 되면 어쩌지. 그것까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공포가 몰아쳤지만 결심한 이상 책임만 떠올렸다.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진다......' 놈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면서 계단 하나에 백 번의 주문을 꾹꾹 눌러 밟았다.






창고 안에 놈을 넣는데 성공했다. 20미터 정도의 거리가 그 열 배는 되는 줄 알았다. 소리 없이 철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음식을 놓아주니 그릇에 얼굴을 묻고 사료와 물을 번갈아 퍼먹는 놈을 보니 한시름 놓인다. 비가 들이치지 않는 구석 자리에 방석을 놓아주었다. 먹을 것을 더 가지러 카페 사장은 나가고 이제 창고에는 나와 놈, 둘만 남았다.



놈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철문 밖을 응시한다. 털갈이가 한창인 놈이 몸을 털자 사방에 죽은 털이 날린다. 놈을 방석 쪽으로 이끄는데 꼭 방석만 피해 다닌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놈에게는 처음인 것이다. 개들이 환장한다는 ‘마약 방석’을 놈이 알 리가 없다. 평생 풀이나 흙을 이불 삼고 잔 놈은 벽이 무엇인지, 비를 막아주는 지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하지만 처음인 것은 피차 마찬가지다. 내 평생 처음으로 바비큐 창고 안에 개와 단둘이 있다. 지금 놈은 전의 나를 따르던 얼굴이 아니고, 놈의 쪼그라든 기운이 내게도 번져 몹시 긴장된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반드시 놈을 구할 것이다!



바비큐 창고에 갇힌 것은 나도 처음이다



야간 당직자에게 새벽에 놈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퇴근길에 까치발을 하고 창고 안을 몰래 살폈다. 꺼내달라고 컹컹 짖으며 난리를 치면 어쩌나 했는데 놈은 마약 방석 위에 실신해 있다. 잠든 것이 아니라 꼭 너덜너덜 헤어져서 떨어진 끈처럼. '차라리 신고해 줘'라고 말하던 놈이 이제는 '차라리 감옥이 편해'라는 얼굴을 하고 있다.



차라리 감옥이 편해요






집 마당에서 백팔번뇌가 인다. 주차를 마친 지는 한참 되었는데 내리지 못하고 있다. 넘어야 할 큰 산이 남았다. 집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 전화상으로 말하라던 주인아줌마를 기어코 밖으로 불러내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연을 듣고 대번에 질색하신다. ‘네. 저라도 당연히 그러겠어요.’ 놈의 암울해지는 미래...... 하지만 빌었다. 죽어가는 것을 모른척할 수가 없다,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셋이(나, 키우고 있는 강아지, 놈을 모두 더한 말이다) 짐 싸서 알아서 나가겠다 등등 눈물이 만조가 되도록 간청했다.



혼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아줌마는 결국 아저씨까지 밖으로 불러냈다. NG 컷이 난 후 대사를 다시 읊는 배우처럼 감정선을 더 미세하게 잡았다. 내 말이 끝나자, “키워.” 한 마디 하시는 아저씨. 그 옆에서 안 되는 이유를 랩처럼 쏟아내는 아줌마. “앞집 개랑 싸움이 나면, 승자를 가리면 되고. 잔디에 똥을 싸면, 치우면 되지.” 아저씨 나이스.



"딱 우리 OO이다", 라며 그제야 아줌마가 참았던 말을 터뜨린다. 늦둥이 딸 이름을 꺼내며 '우리 OO이가 오름이, 백설이, 흑설이(다 기억나지 않는다)..... 를 데려와서', 로 시작되는 이 집의 유기견 히스토리를 전부 나열하신다. 아저씨는 “이 집은 떠돌이 개들이 들어올 터인가 보다”, 하고 아줌마는 "가만, 개집이 필요하겠네. 우리 개집 남는 거 있나?", 하신다. 열렬히 충돌하다가 이제는 골똘히 궁리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웃음이 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속에 뜨거운 것이 솟아오른다. 자신의 처지나 편의보다 생명 자체를 우선시하는 사람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일만 오면 된다!






          이른 새벽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가 잠에서 깼을 때 눈을 뜨자마자 해몽을 찾았다(나는 꿈을 자주 꾸고, 일어나자마자 해몽을 한다). '단시일 안에 커다란 명성을 얻어 지위를 확립하고, 일에 성사를 이루고......' 한 마디로 귀인이 나타난단다. 역시 너란 놈...... 바로 그때, 카페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놈이 사라졌어요!" 나의 귀인이 탈옥했다.



자유를 찾아 떠나간 귀인






*[들개와 노견]은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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