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전 편에 이어)
C는 계획과 열정의 기관차답게, 약속날의 열흘 전 회사소개서를 보내주었습니다.
비록 PDF파일이었지만 따끈따끈하고 설렘이 묻어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본인의 첫 회사소개를 정리된 글로써 소개하는 일은 (과장 조금 보태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건강한 도파민 중에 손에 꼽을 만한 사건인 것 같습니다.
마치 혼자 오랫동안 간직하며 꿈꾸었던 미래를 편지에 조심히 옮겨 적어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 같다고나 할까요? 여하튼 싱겁게 끝나버린 저의 20대 창업을 회상하면서, 회사소개서의 모든 페이지를 하나하나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날,
C, 그리고 C와 공동대표인 감독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열정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우려가 뒤섞인 모습이 마치 위험하지만 엄청나게 즐거운 일을 앞둔 어린아이 같기도 했습니다.
네가 여러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봐왔을 텐데, 우리는 어때? 잘 될 것 같아?
여러 이야기들 끝에 C가 저에게 마지막으로 물은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저는 '모른다'라고 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스타트업이 성공하여 대기업까지 커질지 명확히 알고 있다면 저의 치기 어린 창업이 조용히 막을 내리진 않았을 거고, 지금이라도 당장 회사를 때려 치고 창업을 했을 겁니다.
또한 ESG 컨설팅의 특성상, '먹고 사는 것'이 기본적으로 해결된 기업들만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C와 공동대표인 감독님도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했습니다.
결국 지금 당장 우리가 ESG를 추진해야 할까요?
어렸을 적 즐겨보던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베가본드>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미야모토 무사시는 시골에서 나와 명망 있는 자들의 목들을 베어 입신양명 하고자 합니다.
천부적인 본능으로 차례차례 강자들을 헤쳐나가고 있던 와중에 '보장원'이라는 창술의 명가에 강자를 만나러 가게 되고, 보장원 입구 근처에서 위 장면에서 보이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보장원의 최강자로 알려진 호조인 인슌과 싸우기 전까지 이 할아버지가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대결 전날 저녁을 함께 하다가 '진정한 강함'이란 무엇인지 토론하게 됩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강함이란 '모든 강자들을 꺾고 최고로 강한 자가 되는 것'이라 말하자, 할아버지는 위의 장면처럼 '(진정 강함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즉 최강자가 되기까지) 그때까지 살 수는 있겠냐'라고 묻습니다.
후에 미야모토 무사시는 호조인 인슌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생애 처음 살기 위해 줄행랑을 칩니다. (여담으로 저 할아버지의 정체는 보장원 창술의 창시자이며, 호조인 인슌의 스승인 호조인 인에이 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법인도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늘상 시험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본인의 강함이 어디까지 인지 확인해 보고자 한 것 같이, 대표의 자아탐구/기업의 미션/미래의 모습/가족의 안녕/심지어 일정 금액의 돈 등 무언가를 실현하려 부단히 애씁니다.
비록 그 도전을 멈추고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행복을 누리려는 개인과 법인이 있지만, 그것은 늘상 나아지려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잘'하려고 하지, 못하거나 현상유지를 고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살아남아야 합니다.
영생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내일 그리고 1개월 뒤 먹을 것과 비를 피할 지붕이 있어야 합니다.
C와 감독님을 만나고 온 며칠 뒤에 한 기사를 접했습니다.
"부탄가스까지 버려" 드라마 민폐 촬영.. 제주 숲 '쓰레기 범벅'
제가 성공의 여부를 알 수는 없으나, 생존의 고비를 넘는 시간이 조금 더 빠르게 오고 있다고 보입니다.
C와 감독님이 지리멸렬한 생존의 고비를 넘어 지속가능성까지 닿기를 기원해 봅니다.